안녕하세요, 오늘은 ‘철학자’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인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린 대표적 철학자로, 자연철학자들의 우주론적 질문들을 인간 중심의 윤리적 탐구로 전환함으로써 윤리학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전환: 자연철학에서 인간철학으로
밀레토스 학파, 다원론적 학파 등 앞선 글들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지적 유산들을 살펴보면서 알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이른바 자연철학자들은 주로 우주의 근원(arche)이 무엇인지,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와 같은 자연 현상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탈레스(Thales)가 물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가 공기를 세계의 근원으로 본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장대한 자연철학적 탐구에서 과감히 벗어나 인간의 영혼과 덕성에 대한 탐구로 철학의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그가 남긴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Know thyself)”라는 말은 단순한 격언이 아닌,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소피스트들이 그 이유로 삼았던 인간의 정신이 세계의 본성에 대한 객관적 명백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다만 그가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다만 진정한 지식을 추구했고 경험에 의해 명백히 증명되지 않는 어떠한 사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품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나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문제에만 자신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이 주로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동쪽의 이오니아, 서쪽의 남부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그리스 식민지 내의 다양한 곳에서 활동했다면, 이 시기에는 그러한 탐구가 본토인 아테네를 중심으로 종합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아테네에서 활동했지만 그런 이유로 그의 사상에는 고대 그리스 식민지 시대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나이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활약했던 다원론적 학파인 아낙사고라스에 영감을 받아 ‘정신(Nous)’ 개념을 탐구했고, 엘레아 학파의 논리적 엄밀성을 인간 문제에 적용하여 ‘변증법(Dialectic)’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고 있던 소피스트(Sophist)들과 철저히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로 대표되는 소피스트들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며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주장했다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 대화편에서는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를 두고 논쟁을 펼치기도 했고, 시칠리아 출신 소피스트 고르기아스가 아테네에 수사학을 전파하며 논쟁 문화가 확산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이를 ‘말장난’으로 격하하며 본질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보편적 도덕률의 존재를 논증하고자 했습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의 충격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관통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바로 27년간 지속된 펠레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입니다. 그는 이 전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두 강대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면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민주주의와 과두정의 대립, 해상 제국과 육상 강국의 충돌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전쟁의 전 과정을 목격했으며, 아테네 시민으로서 직접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델리온(Delium) 전투(BC 424)와 암피폴리스(Amphipolis) 전투(BC 422)에서 소크라테스는 중무장 보병인 호플리테스(Hoplites)로 참전했습니다.
이 전쟁은 소크라테스의 철학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아테네의 도덕적, 정치적 혼란은 그로 하여금 ‘정의(Justice)’와 ‘덕(Virtue)’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전쟁 중에 발생한 ‘장수 재판 사건’입니다. BC 406년 아르기누사이(Arginusae)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의 장수들이 폭풍우로 인해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집단 처형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원로원 의원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이 부당한 재판에 맞서 홀로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이는 그의 “다수의 의견이 아닌 정의로운 것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적 신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인식론과 방법론: 무지의 자각에서 진리로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법론은 그의 유명한 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I know that I know nothing)”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닌,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방법론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아포리아(Aporia)’로, 대화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만드는 단계입니다. 둘째는 ‘엘렌코스(Elenchus)’로, 반복된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에 내재된 모순을 드러내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은 ‘마이에우티케(Maieutike)’, 즉 산파술로, 대화 상대방이 스스로 진리를 ‘출산’하도록 돕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의 핵심에는 ‘디알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 dialogomai)’가 있습니다. 이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다’라는 의미로, 후일 ‘변증법(Dialectic)’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일방적인 강의나 교조적인 가르침이 아닌, 대화를 통한 상호 탐구를 중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윤리학: 덕의 통일성과 행복론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핵심은 “덕은 지식이다(Virtue is knowledge)”라는 명제에 있습니다. 이는 윤리적 행위의 근거를 감정이나 관습이 아닌 이성적 앎에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지식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며, 무엇이 올바른지 아는 사람은 그 앎을 바탕으로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누구도 자발적으로는 악을 행하지 않으며, 악행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덕(arete)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지혜(sophia), 용기(andreia), 절제(sophrosyne), 정의(dikaiosyne)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이를 ‘덕의 통일성(Unity of Virtues)’이라고 합니다.
그의 윤리학에서 최고선은 ‘행복(eudaimonia)’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대적 의미의 주관적 만족이나 쾌락과는 다릅니다. 소크라테스적 의미의 행복은 영혼의 탁월성을 통해 달성되는 객관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영혼론: 인간의 본질을 찾아서
소크라테스 역시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아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적 입장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신체에서 비롯되는 정욕을 영혼의 힘으로 완벽하게 제어했던 그는 인간의 본질을 영혼(psychē, ψυχή)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영혼론은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었는데, 그는 영혼을 단순한 생명력이나 호흡의 원리가 아닌, 인간의 이성적, 도덕적 본질로 이해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영혼은 자기 인식의 주체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은 바로 이 영혼의 자기 인식을 의미합니다. 둘째, 영혼은 도덕적 행위의 주체입니다.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바로 영혼의 기능입니다. 셋째, 영혼은 진리 인식의 주체입니다. 감각이 아닌 이성적 사고를 통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영혼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영혼을 돌보라(epimeleia tēs psychēs, ἐπιμέλεια τῆς ψυχῆς)”는 이러한 영혼관을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건강이나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도덕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파이돈(Phaedo)』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논합니다. 그에 따르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는 일시적인 육체적 쾌락보다는 영원한 영혼의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혼론은 그의 윤리학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덕은 지식이다”라는 그의 핵심 명제는 영혼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 가능합니다. 또한 “누구도 자발적으로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영혼이 선을 인식하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추구한다는 생각에 기반합니다. 그의 영혼 개념은 플라톤을 거쳐 신플라톤주의로,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 철학의 영혼 이해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영혼론은 자아와 의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전후 아테네와 소크라테스의 최후
BC 404년 아테네가 패전하면서 민주정은 무너지고 ‘30인 참주정’이 들어섰습니다. 이 과두정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크리티아스(Critias)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후일 소크라테스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민주정이 복원된 후인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새로운 신을 들여온다”는 죄목으로 기소됩니다. 이 재판의 배경에는 전쟁 패배 후의 아테네 사회가 겪은 정신적 혼란과 그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적 문답법은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는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지만, 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서양 철학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진리 추구에 대한 흔들림 없는 태도와 정의로운 삶에 대한 실천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전쟁이 가져온 혼란과 위기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그의 철학이 단순한 이론이 아닌 삶의 실천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직접적인 저술 없이 제자들, 특히 플라톤(Plato)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글쓰기보다 살아있는 대화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문제(Socratic Problem)’로 인해, 그의 사상은 다양한 해석과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비판적 사고방식은 현대 교육의 근간이 되었으며, ‘소크라테스적 세미나(Socratic Seminar)’와 같은 교육 방법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그의 윤리학은 현대 덕 윤리(Virtue Ethics)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철학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보편적 기준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끝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상의 산파이자 스스로 주장했듯 아테나라는 미몽에 취해 있는 짐승을 자극하여 보다 성실한 성찰을 하게끔 신에 의해 보내진 ‘등에(gadfly)’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성찰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고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플라톤은 스승의 구술 철학을 문자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한 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양 철학의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세웠습니다.
음미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_소크라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