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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투스와 서방 수도원 전통의 확립 [#서양철학사 28]

미디옴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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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수도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성 베네딕투스(St. Benedictus, 480-547)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는분도(芬道)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하던 시절 도시의 부패에 실망하여 수비아코(Subiaco) 근처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 그는 후에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성  베네딕투스 , 영혼의 사막으로 가다

베네딕투스는 약 480년 이탈리아 중부 눌시아(Nursia, 현재의 노르치아 Norcia)에서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고, 게르만족의 침입과 내부 부패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습니다. 부유한 가정 환경 덕분에 베네딕투스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문법 등 고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PP. I)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젊은 베네딕투스는 로마에서 공부하며 당시 사회의 타락상을 목격했습니다. 한때 위대했던 제국의 수도는 이제 도덕적 타락과 세속적 향락에 빠져 있었고, 학생들조차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깊은 내적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투스가 많은 이들이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미 한쪽 발을 세상에 들여놓았던 자신을 뒤로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세 무렵, 베네딕투스는 로마의 학업과 사회적 기대를 모두 버리고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soli Deo placere desiderans)”을 추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유모()만을 데리고 로마를 떠나 엔피데(Enfide, 현재의 아필레Affile)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잠시 성 베드로 성당 근처에 머물며 소박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그의 영적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투스가 유모가 실수로 깨뜨린 밀 체치는 도구(capisterium)를 기도로 복원하는 기적을 행했다고 전합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명성을 원치 않았던 베네딕투스는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유모마저 떠나보낸 베네딕투스는 홀로 수비아코(Subiaco)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로마노(Romanus)라는 수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로마노는 베네딕투스에게 수도복을 주고, 가파른 절벽 아래 위치한 외딴 동굴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동굴은 너무 깊숙한 곳에 있어서 로마노는 바구니에 빵을 담아 줄로 내려보내는 방식으로 베네딕투스에게 음식을 공급했습니다.

성 베네딕토
은거하며 기도하는 성 베네딕토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성 로마노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투스가 이 동굴에서 약 3년간 완전한 고립 속에서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세상과 단절한 채 기도와 묵상, 영적 투쟁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정화했습니다. 사막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베네딕투스는 이영혼의 사막’에서 자신의 욕망과 유혹, 두려움과 맞서 싸웠습니다.

일례로, 그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더미에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육체적 고통으로 정신적 유혹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금욕 행위는 당시 수도 전통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며, 베네딕투스가 내적 투쟁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베네딕투스가 이후 자신의 수도회 규칙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금욕주의보다 중용과 균형을 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나친 고행의 한계를 깨달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베네딕투스의 은둔 생활이 끝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습니다처음에는 그들을 물리치려 했으나점차 그들의 진심 어린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그레고리우스는 딱딱한 돌로부터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다고 표현하며베네딕투스가 사람들에게 영적 지혜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베네딕투스의 공적 사역은 곧 첫 번째 수도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집니다. 빈센티오 수도원(Monastery of St. Vincent)의 수도사들이 그들의 원장이 사망한 후 베네딕투스에게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에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엄격한 수도 방식이 그들에게 맞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으나 결국 그들의 간청에 응하게 되었고, 예상대로 베네딕투스의 엄격한 규율에 반발한 일부 수도사들은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투스가 축복의 표시로 잔 위에 십자가를 그었을 때 독이 든 잔이 깨졌다는 기적을 전합니다. 이 사건 후 베네딕투스는 다시 자신의 동굴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명성은 더욱 퍼졌고, 진정으로 영적 지도를 원하는 제자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수비아코 주변에 12개의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고, 각 공동체에 12명의 수도사와 한 명의 원장을 배치했습니다. 이것이 베네딕도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비아코 동굴의 수도원
수비아코 동굴에 세워진 수도원 ⓒ 성 베네딕도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베네딕투스를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한 암살 시도가 이어지자 그는 525년경에 수비아코를 떠나, 로마와 나폴리 중간 지대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해발 519m의 몬테카시노 산으로 향했습니다. 산 꼭대기에 이른 그는 이전에 아폴로 신전이 있던 자리를 허물고 서방 수도회의 모델이 되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설립한 후 자신의 수도회 규칙을 정해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베네딕투스가 작성한 베네딕도 수도회 규칙(Rule of Saint Benedict)은 서방 수도원 전통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간결하고 실용적인 이 규칙은 기도(Ora)와 노동(Labora)의 균형을 강조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보다는 절제와 중용을 추구했습니다. 하루의 일과는 성무일과(Liturgy of the Hours), 성경 독서(Lectio Divina), 육체 노동으로 균형 있게 구성되었습니다.

철학적 측면에서 베네딕도 수도원의 중요한 특징은 안정성(stabilitas)’의 강조입니다. 수도사들은 한 수도원에 평생 머물며 끊임없는 회심(conversatio morum)과 순종(obedientia)의 서약을 통해 영적 성장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안정성은 당시 불안정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내적 발전과 공동체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철학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베네딕도 수도원은 마침내 중세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수도사들은 고대 문헌을 보존하고 필사하는 작업을 통해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유산을 중세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클루니 개혁(10세기)과 시토 수도회(12세기)와 같은 후대 수도원 운동들도 베네딕도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베니딕토회 수사
저녁 기도 중인 성 베네딕도회의 수사(남자 수도사)들 ⓒ John Stephen Dwyer

초기 여성 수도원과 수녀들의 역할

수도원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많은 귀족 여성들이 수녀원(nunnery)을 설립하거나 후원했으며, 그들은 영적 지도자이자 지적 활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로마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인 마르첼라(Marcella, 325-410)는 자신의 저택을 수녀원으로 변모시켰으며, 성 제롬(Jerome)과 교류하며 성경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멜라니아 대(Melania the Elder, 342-410)와 멜라니아 소(Melania the Younger, 383-439)는 예루살렘과 북아프리카에 수녀원을 설립했습니다.

베네딕투스의 쌍둥이 누이인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는 전통적으로 베네딕도회 여성 수도원의 창시자로 여겨집니다. 그녀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제한적이지만, 그레고리우스의 대화록에 따르면 스콜라스티카는 몬테 카시노 근처에 여성 수도원을 설립하고 매년 동생과 만나 영적 문제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또한 6세기 아를의 카이사리아(Caesarius of Arles, 470-542)는 자신의 누이 카이사리아(Caesaria)를 위해 수녀원을 설립하고 수녀들을 위한 규칙(Regula ad virgines)을 작성했습니다. 이 규칙은 여성 수도원을 위한 최초의 완전한 지침서로, 베네딕도 규칙과 함께 중세 여성 수도원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초기 여성 수도원들은 여성들에게 결혼 외의 대안적 삶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지적 활동의 중심지로서 기능했습니다. 많은 수녀원에서 필사와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중세 문화를 지키고 지식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부산에 위치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 OLIVETAN BENEDICTINE SISTERS OF BUSAN

수도원 운동의 철학적 의의와 영향

초기 수도원 운동은 서양 철학사에서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을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은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스토아주의 등 고대 그리스 철학의 다양한 요소들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보존하는 장이었습니다.

수도원 사상의 철학적 특징 중 하나는 아파테이아(apatheia)’헤시키아(hesychia)’의 개념입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아파테이아는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며, 헤시키아는 내적 고요함을 뜻합니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상태를 통해 신에 대한 순수한 관상, 즉 테오도리아(theoria)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문화적으로 수도원은 중세 유럽의 지식 보존소이자 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수도원은 고대의 지혜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안정적인 기관이었습니다. 특히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뿐만 아니라 고전 라틴 문학, 그리스 철학, 자연과학 등의 문헌을 필사하고 연구함으로써 서양 문명의 지적 연속성을 유지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수도원 운동의 또 다른 철학적 공헌 중 하나는 자아와 내면성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볼 수 있듯이, 수도원 전통은 서양 철학에서 주관성과 자기 성찰의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검토와 양심의 탐구는 수도원 영성의 핵심 요소였으며, 후대 철학적 인식론과 윤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직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했다는 점에서도 철학적 함의가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육체 노동은 주로 노예와 하층민의 일로 여겨졌으나, 수도원 전통은 노동에 영적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모토는 관상과 행동,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라는 철학적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이처럼 중세 초기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수도원은 철학적 사유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섬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보존되고 발전된 사상들은 12세기 이후 도시와 대학의 출현과 함께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초기 수도원 운동이 없었다면, 서양 철학사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마치며

사막의 고독 속에서 시작된 초기 수도회의 영적 모험은 공동체적 수도원 생활로 발전하면서 서양 문명의 지적, 영적 토대를 형성했습니다. 안토니우스에서 베네딕투스에 이르는 수도원 지도자들의 삶과 사상은 고대 철학의 유산을 보존하고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중세 철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고대와 중세 전환기의 마지막 인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 대해 다루어보고, 그 이후에는 오늘 살펴본 수도원 전통을 기반으로 발전한 스콜라 철학의 시작과 주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수도원의 고요한 벽 안에서 성장한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며 중세 사상의 황금기를 열었는지 함께 탐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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