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로마법의 체계화와 비잔틴 제국의 철학적 기반 [#서양철학사 26]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527-565)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수복함으로써 ‘우리의 바다(Mare Nostrum: 지중해를 뜻함)’를 대체로 재현한 정복 군주입니다. 그는 “제국을 복원하리라”는 구호 아래 벌인 수많은 사업을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한 인물로 요약됩니다.
내치에 있어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로마법 대전』이라 불리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한 일입니다. 로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민법(民法)’이라는 법체계의 기반을 닦은 법전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법전은, 공법(公法)과 사법(私法)을 분리하여 후대 서양 법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습니다.
로마법을 체계화하고 교리를 통합하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학설휘찬(Digest)」, 「법학제요(Institutes)」, 「칙법휘찬(Codex)」, 「신칙법(Novellae)」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법학 초학자 교육을 위한 교재, 울피아누스 등 고전기 법률가들의 저서에서 발췌한 모음집,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의 황제들의 칙법 모음집,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 이후의 칙법 모음집입니다. 이를 통해 법철학적 원칙들을 체계화할 수 있었는데, 특히 자연법(natural law)과 실정법(positive law)의 관계, 정의(justice)의 개념, 개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관심은 종교 문제에도 뻗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가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단성론을 비롯해 교리적으로 분열한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황제가 신학적, 철학적 문제에 깊이 관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교에 속하는 철학을 위축시키기 위해 그 본산이었던 아테네의 철학 학원들을 폐쇄하였고(532년), 철학자들을 내쫓았습니다. 또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동방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유명했던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을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기독교 교리의 통일을 위해 그는 ‘신칼케돈주의(Neo-Chalcedonianism)’라는 신학적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신칼케돈주의란 키릴루스의 그리스도론과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조화시키려는 정교한 신학적 시도입니다. 황제 자신이 이 해석을 수용하였고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 승인함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통합하려 하였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그의 뜻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삼장서 논쟁, 다시 불붙은 그리스도론 문제
이 새로운 운동의 주요 과제는 그리스도라는 두 본성의 ‘위격적 결합’의 본질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론으로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끌어 낸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 등과 같은 대칭적 이원성과 키릴루스가 주장한 ‘예수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신’ 등과 같은 일원론적 표현을 동시에 긍정하는 변증법적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에 따라 본성은 위격 안에서만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고, 위격은 본성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본성을 통해서만 행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정치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오히려 ‘삼장서(三章書, kephalia) 논쟁’이라는 교회의 분열만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삼장이란 테오토코스 논쟁에서 신성과 인성을 철저히 구분하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에 기운 안티오키아 학파의 세 교부, 테오도루스, 테오도레투스, 이바스의 저술을 가리킵니다. 분쟁의 씨앗은 네스토리우스파로 의심되는 이들 세 교부를 복권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의 복권과 관련해서 황제의 아내이자 함께 국정을 이끌던 여걸이면서, 신앙심이 깊었던 테오도라 황후가 개입하게 됩니다. 이 시기 단성론자들과 교분을 쌓은 황후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성론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교부들을 정통으로 인정하고 복권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황후는 단성론을 지지받고자 당시 교황 대리로 동로마에 파견 온 비질리우스(Vigilius)에게 접근하였고, 교황 선출 과정에 개입하여 비질리우스를 로마 교황 자리에 착좌시켰습니다. 황후는 교황이 자신의 뜻대로 단성론을 인정하고, 이와 관련해서 파면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안티무스를 복직시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비질리우스는 교황이 되자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교황 레오 1세의 가르침을 옹호한다고 밝히며 전임 교황들의 양성론을 따랐고, 황후는 결과적으로 비질리우스에게 속은 것이 되면서 뜻대로 단성론을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양 회의의 시차를 두고, 에페소스에서 단죄받은 네스토리우스파와 칼케돈에서 단죄받은 단성론자 양쪽 이단이 이후에도 계속 갈등을 빚자, 이들을 어떻게 로마 교회 안으로 포섭하고 통합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황제는 황제 나름대로 카이사레아의 주교 테오도로 아스키다 등의 조언에 따라 네스토리우스파를 다시 단죄하면, 에페소스 공의회의 결정을 환영했지만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 실망했던 단성론자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황후의 영향력도 한몫했습니다.
이에 따라 황제는 544년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네스토리우스파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세 명의 주교와 그들의 저술을 단죄하는 칙령을 발표하지만, 이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양쪽 모두에게 큰 반발만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서방 교회로서는 이미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한 단성론자를 사실상 묵인하는 꼴이니 반대하고, 네스토리우스가 속해 있었던 동방의 안티오키아 학파로서는 이미 세 교부를 승인한 칼케돈 공의회의 복권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재차 단죄하는 행위에 극렬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553년 5월 황제의 칙령을 거부한 교황 비질리우스가 참석하지 않은 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오스가 대행하여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었고 삼장서를 공식적으로 정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만 약화시킨 셈이 되면서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게 됩니다. 나아가 단의설(單意說, Monothelitism)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대두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이후 7세기까지 그리스도론 문제로 교회 사회를 들끓게 했습니다.
비질리우스 교황은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당시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강제 소환되어 있었지만, 소환 당시에도 시칠리아에 1년이 넘게 체류하다 넘어왔고, 그가 떠난 로마는 고트족에게 포위당하여 공격받는 처지에 놓이면서 민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또 공의회가 열리자 입장이 난처해져서 이번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시 칼케돈으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교황은 처음에 공의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다가 같은 해인 553년 12월 결국 공의회를 승인하고 이듬해 결정을 재가하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남긴 유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 학당(Academy of Athens)을 폐쇄한 일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있어 아테네 학당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종종 고대 철학의 종말이라 해석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 철학 전통이 기독교 세계관 안으로 흡수되고 변형되는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그리스 폴리스 도시 국가와 현재의 로마 제국은 분명 다른 당위성과 환경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결과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 신앙을 통합하는 비잔틴 문명의 철학적, 문화적 기반을 확립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의 변천사를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상과 정책은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그는 로마의 유산을 보존하고 부활시키려 했으며, 동시에 기독교 세계관을 제국의 철학적 기반으로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는 ‘제국의 복원(Renovatio Imperii)’이라는 목표 아래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군사, 행정, 법률, 종교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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