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에서 중세는 일반적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4~6세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부터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시기는 중세를 대표하는 스콜라 철학을 이해하기에 앞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유럽 사회에 확산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지만, 여전히 그 위치는 불안했습니다. 교리 자체도 아리우스파와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 등과 같은 여러 분파들로 분열되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고, 로마 황제도 정치적 득실 관계에 따라 전통 다신교 신앙을 부활시키려 하거나 전쟁에서 로마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유피테르(Jupiter, 주피터,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해당)의 숭배 여부를 둘러싸고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그 와중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이듬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면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립합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제국은 동과 서로 영구히 분열되었고 결국 410년 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로마 함락의 책임을 그리스도 숭배 탓으로 돌리는 반기독교 정서가 극에 달함에 따라 『신국론』을 통해 기독교를 변호하며 나선 인물이 지난 포스팅에서 다룬 성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후 철학은 사실상 소멸하다시피 했는데, 난폭한 게르만 왕국들이 파괴를 일삼은 탓도 있지만 수세기에 걸쳐 끝없는 전쟁이 반복되며 문명이 전반적으로 쇠퇴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심한 혼란기 속에서 그의 뒤를 잇는 교부들과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을 바탕으로 기독교 사상을 옹호하고, 고대 로마 문화를 보존하며, 교회법과 제도 형성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키릴로스와 네스토리우스가 벌인 진검 승부, 그리스도론 논쟁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Alaric)는 410년 로마의 약탈을 이끌었지만 그해에 죽었습니다. 동고트족의 왕 오도아케르(Odoacer)는 47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지만 493년 테오도리쿠스라는 동족의 배반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자리를 잡았고, 서고트족은 프랑스 남부에, 프랑크족은 프랑크 북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한 프랑크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리우스파로 개종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교회 역시 교리와 관련한 사상적 투쟁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육화(肉化)를 두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대립이 그것입니다. 앞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이어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도 성자가 성부와 똑같은 신성을 지닌 동일한 본질임을 재확인하고, 아울러 성령 또한 신성을 지닌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지만, 이들 공의회 이후 불거진 불명확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位格, Hypostasis)이 동일 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로 똑같은 신성을 지녔다는 결론으로 위격의 동일성은 확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으로 사람이 되셨을 때는 우리에게 신성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인격)’이라는 사람의 본체로도 인식된다는, 즉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physics, ψυσιs)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때 이 두 본성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라는 인물로 하나가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말씀, 로고스)이 동일한 본질로 성자 예수(육신)의 위격이 되어 오셨을 때, ‘말씀이 곧 육신이 되었다’고 보아 말씀이 인간 육신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로고스가 곧 육신이 되었다’고 보아 인간 예수를 바로 하나님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쟁점을 일으킵니다. 첫째, 전자에 따라 성부, 성자라는 동일한 하나님의 두 위격이 존재한다고 볼 때 그 본성이 하나는 신성이고 다른 하나는 인성으로 구분되어, 두 본체(hypostasis)가 병존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지. 둘째, 그게 아니라면 후자에 따라 성자라는 하나의 위격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존재하거나, 또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으로만 존재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이 갈등은 초기 교부들인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등으로 이어지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그에 반대하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갈등에서 비롯되어 이후에도 끊임없이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뿌리 깊은 것이었습니다.
두 학파는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서부터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 문자 그대로의 해석보다는 상징과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선호하는 한편, 안티오키아 학파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 맥락과 문법적 구조를 바탕으로 한 해석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도 대립했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신이라는 점을 부각했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 즉 인간적인 삶과 고난을 통해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어찌 불러야 하오리까
이러한 대립은 결국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를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를 놓고 크게 불거졌습니다. 4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 문제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일부에서는 마리아가 인간인 예수를 낳았으므로 ‘인간의 어머니(Anthropotokos, 안트로포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고, 일부에서는 이에 반대하며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테오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양쪽 지지자들의 대립이 격해지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of Constantinople, 386-450)가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는 두 칭호에 대한 대안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크리스토토코스)’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관점을 이어받은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어머니라는 관점을 좀 더 신성한 용어인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각하면서도 반대 측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처리 방식은 교회의 초창기부터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공경해온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관점을 이어받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Cyril of Alexandria, 376-444)가 개입하면서 더 복잡해졌습니다. 키릴로스는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의 아들일 뿐이라면 그 죽음이 어떻게 구원을 줄 수 있느냐며,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칭해야 한다는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에서는 테오토코스, 즉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지만, 자칫 마리아를 우상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와 인격의 통일성을 지나치게 주장한 나머지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부정하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에 논박하는 입장에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병존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인간 예수라는 인격 안에 말씀(로고스)이라는 신격이 깃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인 마리아로부터는 인성과 인격만이 오고, 신성과 신격은 올 수 없음에 기인합니다. 이에 기반하면 마리아는 인간의 어머니일 뿐이므로 그리스도의 신격에는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 교리상으로도 깔끔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칭함으로써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고 미흡하게나마 신성까지 배려한 점은 좋았지만, 엄연히 인간인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인격만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신격이 떨어져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태어나면서부터 신성을 부여받은 것이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키릴로스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광신적 열의에 가득 찬 인물이었던 키릴로스는 그리스도의 단일성(unity)을 강조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요한복음서 1장을 말씀, 즉 로고스와 육신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해석하면서, 인간 예수는 로고스로서 바로 하나님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신이라는 관점에 따라 예수는 ‘독생자 예수’가되는 것이요, 동정녀 마리아는 “신성을 낳은 이(테오토코스)”, 즉 ‘성모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측을 옹호했습니다.
에페소스 공의회에서의 최종 결착
결국 이 문제는 키룰루스를 지지하는 주교들과, 네스토리우스(Nestorius of Constantinople, 386-450)를 지지하는 주교들로 교회가 양분되면서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집트의 항구도시 수에즈를 기준으로 동쪽의 주교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지지했고, 서쪽의 주교들은 키릴로스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Council of Ephesus)가 열렸습니다. 회의 결과 서방 주교들의 주도로 키릴로스의 입장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후에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Petra)로 추방당해 451년 수도원에서 죽었습니다.
이단이 된 그는 로마에 발붙이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의 신학을 따르는 무리들은 중동 등 동방 지역에서 선교 활동과 신학 교육을 벌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이라크의 아시리아 동방교회 및 그 분파인 인도의 토머스 교회(마라발파)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과거 중국에까지 전해져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했다가 9세기 중엽 무종의 종교 탄압과 황소의 난 등으로 인해 중국 본토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에우티케스의 단성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이 논쟁은 이 둘로 그치지 않고, 시즌2로 이어졌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에우티케스(Eutyches, 약 380-456)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키릴로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이었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키릴로스의 단일 본성 이론을 극대화했습니다.
에우티케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장은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본성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융합되어 새로운 단일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우리 주님께서 결합 이전에는 두 본성을 가지고 계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결합 이후에는 한 본성을 가지고 계심을 인정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적 요소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에우티케스의 이른바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적 접근은 당시 지배적이던 양성론(兩性論, Dyophysitism)과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으며, 다시 교회의 분열을 불러왔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와 에우티케스의 정죄
이 문제로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20년이 지난 451년에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회의 결과 그리스도 안에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며, 분할되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두 본성이 존재한다는 양성론의 입장이 채택되었고, 에우티케스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칼케돈 신조(Chalcedonian Creed)를 채택하였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로 신성이 같고, 인격의 측면에서 보면 신성으로는 성부와 본질이 같고, 인성으로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본질이 같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로고스가 사람의 몸으로 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으로 인식되는데, 이 두 본성은 혼합되거나 변화되거나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그 고유한 속성이 하나의 위격 안에서 그대로 유지된다.
특히 “양성은 각 본성의 특이성을 보유하면서 하나의 인격(프로소폰)과 하나의 실체(휘포스타시스)로 연합되었다”는 표현에서 ‘인격, 위격’을 뜻하는 프로소폰(prosopon, πρόσωπον)을 사용하면서, 하나의 본성으로 오해받을 소지를 없애기 위해 ‘위격, 실체’를 뜻하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ὑπὸστασιν)라는 용어를 재차 언급함으로써, ‘한 위격 안의 두 본성’이라는 교리를 확정하였습니다.
결론: 치열한 논박과 검증으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세우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본성’으로 설명한 단어인 physics(ψυσιs)가 라틴어에서는 위격을 뜻하는 프로소폰(페르소나)으로 해석되는데, 대다수의 그리스어권 신학자는 이 단어를 본질을 뜻하는 휘포스타시스로 이해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신학자들은 주로 학문 연구에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 제롬(Jerome, 히에로니무스, 약 347-420) 같은 보편교회 신학자는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 성경의 번역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주교들에게 서방 교회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강생 후에도 하나의 ‘본성을 유지한다’”라는 라틴어가 비록 그 뜻이 하나의 위격(프로소폰)을 유지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어로 ‘본질(휘포스타시스)를 유지한다’라고 이해하게 되면 성육신 이후에도 성부의 본질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합니다.
이는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동방의 주교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부정한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다를 것이 없는 사상으로 흘러갈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성부의 본질에서 성자의 본질을 떼어내 구분코자 한 듯 보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가 그리스도의 본성을 지나치게 하나로 보아 이단이 되었다면, 네스토리우스는 지나치게 분리한 것이 이단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에페소스 공의회에서도 키릴로스의 ‘한 본성’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한 위격 또는 인격’의 의미로 이해하고 넘어간 바 있습니다.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 하나만을 지닌 것처럼 언급하지 말아달라 요청했지만, 오해의 불씨는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에우티케스가 단성론을 주장한 것도 그것이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지금도 번역의 문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삼위일체론의 위격을 오늘날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 역할)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 자칫 하나님의 양태(mode)를 강조한 사벨리우스의 모달리즘과 유사한 이단적 해석을 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에우티케스가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긴 했지만, 그 추종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동방 정교회의 일부 지역, 특히 시리아, 이집트, 아르메니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오늘날 콥트 정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와 같은 ‘오리엔트 정교회’는 에우티케스의 직접적인 후계자는 아니지만, 그의 단성론적 그리스도론과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313년 이후 451년까지 4~5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연이은 전란과 제국의 분열로 신음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비롯해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를 거치며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교리들이 치열한 논박과 검증을 통해 정리되어 채택된 매우 의미 있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 논쟁은 ‘테오토코스’, ‘휘포스타시스’ 등을 둘러싼 단순한 용어 문제가 아니라, 구원론(soteriology)과 그리스도론의 핵심에 대한 깊은 철학적 문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논쟁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차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학파 간의 철학적 접근 방식의 차이, 나아가 중세 철학자들의 신학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틀을 제공해 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