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가톨릭 교회 이념의 형성 과정에서 내부적 도전을 제공한 두 가지 중요한 분파가 바로 노바티우스설(Novatianism)과 도나투스설(Donatism)입니다. 이 두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순수성과 성직자의 도덕적 자격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본질, 성례전의 효력,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에 관한 깊은 신학적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서 중세 철학의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노바티우스설(Novatianism): 교회의 순수성과 용서의 한계
노바티우스(Novatianus, 200-258년경)는 로마의 신학자이자 사제로,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250년) 이후 교회 내에서 발생한 ‘배교자(lapsi, 背敎者)’ 문제에 관해 엄격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여러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신을 숭배할 수 있었는데, 데키우스 황제는 로마 국가와 전통 종교를 강화하고자 황제 역시 신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희생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여러 신을 자유롭게 믿은 로마 시민들로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적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때 신자들의 행동은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 끝까지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과 신앙에 대한 불충을 거부하고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 그리고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자 희생물을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배교자’ 또는 ‘이탈자’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251년 3월 데키우스 황제의 사망으로 박해가 끝나고 난 이후가 더 문제였습니다. 배교자들은 위기가 지나가자 다시 교회로 돌아가기를 원했는데, 이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교회는 행정상, 교리상의 큰 논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지방의 교회 지도자였던 노바티우스는 이들이 박해 기간 동안 신앙을 부인하고 이교 제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회로 재입회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바티우스는 살인, 간음, 배교와 같은 ‘사망에 이르는 죄(mortal sins)’는 인간의 용서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최후의 심판에서 이를 다루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교회를 ‘순결한 자들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중대한 죄를 지은 자들은 영구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비안 주교의 순교 이후 새로 임명된 로마의 주교 코르넬리우스는 배교자들의 복귀 승인을 권고했으며,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종교 회의인 251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노바티우스를 파문했습니다.
이에 코르넬리우스와 주교 자리를 놓고 경쟁할 정도로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노바티우스는 같은 해 자신을 로마의 대립 주교(antipope)로 선출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중요한 분열주의(schism)를 일으켰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순결한 사람들(katharoi)’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순수파 운동은 로마에서 시작되어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까지 퍼졌으며, 6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한편,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성 키프리아누스(St. Cyprianus)는 코르넬리우스를 옹호하며 노바티우스설에 강력히 반대했는데,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배교자들에게도 회계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 역시 죄인들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분열주의를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입장은 교회의 공식적 이념으로 여겨지게 된 원리를 형성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미 구제 받은 사람들의 단체가 아니며, 오히려 교회가 하는 역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 약간의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게끔 자리를 제공하는 이른바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널리 알려지고 유일한 구원 수단인 교회로부터 분리되게 하는 분열주의야말로 최대의 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교들은 그리스도가 권위를 부여한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교회의 전통성과 권위를 설명하는 핵심 요소라는 사도 계승(使徒繼承)의 이념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교 없이는 교회가 없고, 교회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생각으로 마치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없이는 아버지에 해당하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그 안에 계속해서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교회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가 되었습니다.
즉 교회는 개인들이 모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들에 앞서 있다는 것, 시간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앞서는 것이었으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실재성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도나투스설(Donatism): 성직자의 도덕성과 성례전의 효력
도나투스(Donatus Magnus, 313-355년경 활동)의 이름을 딴 이 운동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303-305년)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노스의 박해도 역시 황제를 숭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다시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이주하거나, 박해에 순응하거나 박해에 저항하는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임하고 309년 황제 숭배 칙령도 끝나면서 길었던 박해는 끝이 났습니다. 313년 마침내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끝까지 박해에 저항하며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 재건을 위해 애썼습니다. 이때 배교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출교 조치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도나투스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바티우스 때와 마찬가지로 박해가 지나가자 이번에도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이번 복귀는 노바티우스 때와는 다르게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바로 배교자들 사이에 성직자가 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교 행위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은 박해 중에 성서를 이교도 관리들에게 넘겨준 성직자들의 재임명을 거부했으며 그들이 집전한 성례전(sacrament, 聖禮典)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성례전이란 세례식, 성만찬을 비롯한 예식을 뜻합니다. 이때 강경파가 취한 입장은 성직자의 개인적 거룩함이 그가 집전하는 성례전의 효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불순한 손으로는 거룩한 성례전을 집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과 타협한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했으며, 교회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배반한’ 성직자들이 집전한 세례는 무효이므로, 그런 성직자에게 세례받은 신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문제들을 양산했습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불순한 성직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재차 세례를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자신의 신앙 자체에 대해 일종의 회의감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성격을 가진 도나투스파에 대해 보편교회는 배교자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고 결국 극단적인 논리와 행동을 일삼는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도나투스파는 배교자를 받아들인 보편교회를 부정하면서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 지역에서 독자적인 교회를 유지했습니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보편교회의 전통은 그대로 따랐으며 북아프리카, 특히 누미디아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면서, 5세기에 이르러 이 지역의 주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종종 사회적 불만을 가진 베르베르 원주민들과 연합하여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고 6세기 이슬람이 카르타고를 점령하면서 사라지기 전기까지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도나투스설과의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대응을 통해 정통 교회의 성례전론이 발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첫째, 성례전의 효력은 집전하는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정과 성령의 임재에 기인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른바 사효성(ex opere operato, 事效性)의 원칙입니다. 성사를 받는 사람이나 집행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은총이 달라진다는 인효성(Ex Opere Operantis, 人效性)의 원칙과는 반대의 원칙입니다.
둘째, 교회는 죄인과 성인 모두를 포함하는 ‘혼합된 몸(corpus permixtum)’이며, 최후의 심판 전까지는 완전히 순수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이단자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했는데, 국가 권력도 바르게 사용되기만 한다면 결코 악하지 않으며 악행으로 이루어진 ‘지상의 나라’에 굴종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두 이단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과 그 영향
노바티우스설과 도나투스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은 교회의 본질과 성례전에 관한 중요한 교리적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첫째, 교회의 이중적 성격 인식입니다.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이중적 성격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거룩한 교회(holy church)’와 ‘죄인들의 교회(church of sinners)’라는 역설적 이해로 발전했습니다.
둘째, 성례전의 객관적 효력을 확립했습니다. 성례전은 집전하는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게 효력이 있다는 원칙이 확립되면서 가톨릭 성례전론의 핵심 원칙이 되었습니다.
셋째,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 강조입니다. 회개한 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교회의 권위와 능력이 강조되었으며, 이러한 영향은 고해성사(confession)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넷째, 교회와 국가의 협력 모델을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적 정당화는 중세 시대 교회와 국가의 협력 모델, 특히 이단 척결을 위한 협력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두 이단 운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응은 단순히 교회 내 분쟁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교회론(ecclesiology), 성례전론(sacramental theology), 그리고 구원론(soteriology)의 중요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기여는 이후 중세 가톨릭 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도 중요한 논쟁점으로 다시 부각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두 운동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가 되면서 겪게 된 정체성의 위기와 변화를 반영합니다.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제국의 공식 종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교회는 순수성과 포용성,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교회는 이제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되었으며 교회의 공직은 그 자리에 앉는 사람들의 인격이 어떠하든 간에 신성한 것이라는, 바로 사람의 힘이 아닌 교회의 성스러움에 의존하는 것임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제 신앙은 아무런 경험적 입증도 요구하지 않는 보다 확고한 것이 되었으며,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이 사람 속에 재림하고 그 성령이 하나님에서 온 것이라면, 그 성령은 의심할 바가 없었지만,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이제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말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련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한 성령에 대해 의심을 품어 왔으며, 결국 그들을 파문하고, 성령의 정상적 기능을 교회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제 교회는 새로운 합리론의 절대적인 근거가 되었으며 중세를 통틀어 모든 철학적 합리론의 전제가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중세 시대의 철학은 이제 교회 속에서, 그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논리적 결론의 탐구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