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교부들과 가톨릭 교회의 형성
로마 시대 수많은 종교 집단 중 하나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세력을 키우고 체계화되는 데는 사도 바울 이후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기까지 약 4세기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형성기의 험난했던 과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끌던 초기 기독교 집단은 규율도 조직의 통일성도 보편적으로 인정된 실천의 규준도 없이 단순한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체계적인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교부(敎父, Church Fathers)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교회는 어느 정도 공식화된 제도하에서 정식화된 신조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조직체가 되었는데, 교부란 이러한 초기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로 그들의 저술과 활동은 이후 교회의 신학적, 철학적 방향을 설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더 통일되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까지도 교회에 포섭하기 위해, 또는 기독교를 믿으나 의견을 달리하여 교회의 정통성과 권위를 저해하는 흐름을 단속하기 위한 강력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순교와 이단설에 대한 단죄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부들은 단순히 신학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martyrus)이거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수호한 고백자(confessor)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플라톤주의, 스토아주의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유대교 전통이 융합된 독특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보편적(universal)’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교부들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다양한 지역 교회들을 하나의 보편적 교회로 통합하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단(heresy)과의 논쟁을 통해 정통 교리(orthodoxy)를 확립했고, 교회의 권위(authority)와 전통(tradi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초기 가톨릭 교회의 핵심 교부인 순교자 유스티노스(Justinus Martyrus)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등의 사상을 탐구하면서 철학과 신학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이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변증가들: 유스티노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철학을 바라보는 두 시선
기독교 사회의 몇몇 초기 교부들은 철학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도들의 입장에서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온 설명이 필요 없는 신성한 것임에 비해, 그리스-헬레니즘 사상은 그저 인간들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지극히 사변적이고 모순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도들 중에서도 그리스-헬레니즘 사상을 이어받아 기독교의 신념과는 동떨어진 결론에 도달한 신자들, 즉 이단에 대한 공포심이 기독교 사회를 괴롭혔습니다. 그 결과 철학이 신앙을 방해하며, 심지어 곡해하기까지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나아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신앙 자체를 파괴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사상의 뿌리는 매우 깊은 것이었고 이 체계적인 사상에 기반한, 지적이지만 적대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에 대해 교회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람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만한 교회 자체의 역량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체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교자 유스티노스는 헬레니즘 세계와 기독교의 문화적 교량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한 인물이었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노스: 이성과 신앙의 조화
순교자 유스티노스(Justinus Martyrus, 100-165)는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변증가(apologist)로 그리스 철학적 전통 속에서 기독교를 변호한 인물입니다. 사마리아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현재의 나블루스)에서 태어난 그는 철학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다양한 철학 학파를 탐구한 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유스티노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한 시도입니다. 그는 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선행하는 진리의 단편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로고스(Logos, 말씀)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두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유스티노스는 그리스도를 우주적 이성인이자 로고스의 완전한 현현으로 제시했습니다.
그의 대표적 저서 『변증문(Apologies)』과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에서 유스티노스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에게 내재된 로고스의 ‘씨앗(logoi spermatikoi)’으로 인해 이미 일부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이 로고스의 완전한 현현으로 이전의 모든 부분적 진리를 완성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이 가진 긍정적인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 역시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 신앙으로 향하는 길을 준비했다고 생각하며 플라톤의 개념들을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데 활용한 그는, 예를 들면, 플라톤의 ‘최고선(最高善)’ 개념을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에 연관지으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하며, 완전한 초월적 진리는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이단과 우상 숭배에 대해서는 인간이 만든 신들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하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이후의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는 것은 부당하며, 로마 제국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로마에서 기독교를 가르치고 전파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재판에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으며 기독교가 진리임을 주장하다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이름대로 ‘순교자(Martyrus)’가 되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신앙의 역설과 교회의 권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 출신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20)는 유스티노스와는 다른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법률가로서의 배경을 가진 그는 강력하고 논쟁적인 스타일로 기독교를 변호했으며, 교회법(canon law)의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삼위일체(Trinity) 교리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위격(位格, persona)’, ‘실체(實體, substantia)’와 같은 라틴어 용어를 기독교 신학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저서 『이단 반박 논설(Prescription Against Heretics)』에서 이단 전반에 대해 다루면서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철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남긴 가장 유명한 문구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카데메이아와 교회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입니다.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신앙(예루살렘)과 철학(아테네)이 본질적으로 무관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특히 그리스 철학이 이단의 뿌리라고 지적하며, 철학적 개념이 신앙을 왜곡한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키온 논박(Adversus Marcionem)』에서는 구약의 신(정의, 폭력과 보복의 신)과 신약의 신(사랑의 신)을 이원화함으로써 존재론적 문제를 제기한 이단 종파인 마르키온주의에 대해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었음을 논증하며,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를 비롯한 여러 역설적 주장들을 남겼습니다. 이는 종종 이성과 신앙의 대립으로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신적 계시의 초월성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러한 엄격한 이단론은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기 신앙을 배반한 사람들(lapsi, 배교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엄격주의는 이후 수도원 운동(monasticism)의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도덕적 엄격성에 기초한 신앙은 보편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교회는 성령의 교회이지 죄인들의 교회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단인 몬타누스파(Montanism)의 종말론적 운동에 합류하여 더욱 엄격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일부 저술은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융합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약 150-215년)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신학자이자 교부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체계적인 융합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입니다. 아테네에서 태어나 헬레니즘 교육을 받은 그는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한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였는데, 당시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지적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판테누스(Pantaenus)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Didascalium)의 학생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 학교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오리게네스가 이끌게 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202-203년) 기간 동안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소아시아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약 215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권유하고, 그리스 신화와 신비종교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했습니다. 개종한 신자들을 위해 일상생활의 다양한 측면에서 기독교인다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기도 하며, 그리스도를 ‘교육자(paedagogus)’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클레멘트 신학의 중심에는 ‘신앙(pistis)’과 ‘지식(gnosis)’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신앙과 지식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둘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신앙은 단순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향한 여정의 첫 단계임을 강조했는데, “신앙 없이는 지식이 없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또 영지주의자들의 엘리트주의적 개념에 반대하며, 신앙을 통해 더 깊은 영적 지식에 도달한 성숙한 기독교인이라는 의미로 ‘참된 그노스틱(true gnostic)’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지식의 궁극적 목표는 ‘신과 같이 되는 것(theosis, 신화)’입니다. 이는 플라톤의 ‘신을 닮음(homoiosis theo)’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클레멘트는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대한 ‘준비(praeparatio evangelica)’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로고스)는 모든 진리의 원천이므로, 그리스 철학에서 발견되는 부분적 진리들도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로고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를 향한 ‘교육자(pedagogue)’였듯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철학이 그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철학을 기독교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는 과정에서 모든 철학적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기독교 계시와 조화되는 요소들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클레멘트의 윤리 사상은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아, 금욕주의와 쾌락주의 사이의 균형 잡힌 접근법을 옹호했습니다. 『교육자』에서 그는 식사, 의복, 웃음 등에 있어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지킬 것을 권고합니다. 그에게 사랑(agape)은 모든 덕의 완성이며, 참된 그노스틱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지적인 동시에 실천적입니다.
또한 그는 성서 해석학에 큰 기여를 했는데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 Judaeus, 기원전 30년경 - 기원후 45년경)의 영향을 받은 알레고리적(풍유적) 방법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성서가 표면적인 글자적 의미 외에도 더 깊은 영적, 신비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으며, 특히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시하는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또한 성서 해석의 목적은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 신비적 관상(contemplation)을 통한 신과의 만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은 이후 오리게네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이후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라는 중세 신학의 기본 원칙을 선구적으로 제시한 그의 사상은 오리게네스를 통해 계승되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가파도키아 교부들(성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니사의 그레고리)과 동방 정교회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많은 측면에서 ‘교량’의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 지성과 신비주의, 동방과 서방, 그리고 유대-기독교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초기 기독교가 헬레니즘 세계와 어떻게 대화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오리게네스: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과 조직신학의 시작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성서 해석에 큰 기여를 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그의 방대한 저술활동은 이후 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ndrian school)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융합을 시도하였으며,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했고, 특히 성서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 저서인 『원리론(De Principiis)』은 최초의 조직신학서로 간주되며, 그의 『헥사플라(Hexapla)』는 히브리어 성서와 다양한 그리스어 번역본을 대조한 대규모 문헌학적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성서 해석에 있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준을 구분했습니다:
1. 문자적 의미: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
2. 도덕적 의미: 신자의 영적 삶에 적용되는 의미
3. 영적/알레고리적 의미: 더 깊은 신학적, 신비적 의미
그는 최종적으로 모든 피조물(심지어 악마까지도)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보편구원설을 주장했으며, 영혼들이 물질적 세계 이전에 존재했다는 영혼의 선재설(pre-existence of souls)과 그리스도를 영원한 로고스로 보는 클레멘트의 생각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일부 사상들은 나중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의 성서해석학적 방법론과 신학적 체계성은 정통 가톨릭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노바티우스설(Novatianism)과 도나투스설(Donatism) 두 이단설의 도전을 중심으로 이에 응답하는 성 키프리아누스(St. Cyprian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등 교부들의 사상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한층 치열해지는 이단 논쟁의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 이념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실은 무엇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