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교의 신비사상
사실 오늘의 포스팅을 시작하기에 앞서 시기적으로 너무 앞서 있다는 점과 신화의 영역을 다루어야 하는 점에서 오르페우스교를 언급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만, 서양철학의 시작점부터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종교 사상이기에 교리적인 측면에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가고자 합니다. 오늘 포스트의 주제인 신비주의 역시 신플라톤주의의 한 축을 이루는 신비주의를 좀 더 심도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밀교(密敎, Esotericism)인 오르페우스교(Orphism)는 대표적인 신비주의 종교로 전설적인 시인 오르페우스(Orpheus)의 가르침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설파하는 영혼의 윤회(metempsychosis)와 해방을 핵심으로 합니다.
오르페우스는 호메로스보다 이전에 살았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디오니소스적인 측면과 아폴론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은 음악과 시, 광기 등입니다. 아폴론적인 측면은 금욕주의를 통한 영혼의 정화(카타르시스)입니다. 요약하자면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에 기반하지만 아폴론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오르페우스교의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오는 신화시에서 언급되는 내용으로, 모든 것의 근원을 시간(크로노스)으로 보고, 최초의 창조 원리를 에로스(파네스)로 설명합니다. 절대신인 제우스가 파네스를 삼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이야기는 우주의 순환과 재창조를 상징합니다.
디오니소스는 부활하기 전 자그레우스라는 신이었는데 티탄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은 뒤 먹혔다가 남아 있는 심장을 통해 인간인 세멜레의 몸에서 환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티탄은 분노한 제우스의 번개를 맞고 재가 되었는데 이 재에서 인류가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즉 인간은 티탄의 후예로서 죄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동시에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의 신성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티탄의 원죄로 인한 무지와 고통, 악함과 자그레우스의 신성으로 인한 지혜, 사랑, 선함이 함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의 육체는 ‘형벌’을 상징합니다. 즉 최초의 죄에 대한 처벌로서 육체에 갇히게 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니소스가 부활했듯이 엄격한 계율과 정화의식(teletai)을 통해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신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호메로스가 영혼을 단순히 육체의 그림자로만 바라봤던 시각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영혼에 둠으로서 육체는 유한하지만 존재는 영원불멸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절대자를 향한 아폴론적인 수행, 즉 금욕주의와 채식주의, 잃어버린 지식을 상기(nanmnesis)함으로써 무지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혼의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르페우스교의 사상은 플라톤의 영혼론과 후대 신비주의 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피타고라스학파와 수의 신비
신피타고라스학파(Neo-Pythagoreanism)는 기원전 6~5세기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등장한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을 신비주의적으로 재해석하고 플라톤의 사상과 결합하여 독특한 철학 체계를 형성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니기디우스 피굴루스(Nigidius Figulus, 기원전 98 - 기원전 45)의 시도로 시작되었으며, 대표적 사상가인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of Tyana)는 수(數)의 신비한 의미와 우주적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철학이 메마른 형식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장 훌륭하다 여기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에 종교적 요소를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플라톤의 후기 사상으로 돌아가, 그가 피타고라스 학파의 합리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신화와 다채로운 은유를 들면서 다소 신비적으로 묘사한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플라톤 자신이 상당한 문학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로부터 그의 저작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신화와 은유를 문자 그래도 해석하고 고정적인 교리로 바꾸어버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 말한 가장 높은 단계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를 ‘일자(一者, The One)’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자는 무한과 유한의 대립을 통합하는 절대적인 선으로서 모든 존재와 현상의 논리적 전제이자 필수 조건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너무나 완전하여 모든 생명력이 이로부터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하의 유출설에 관한 내용 즉, 일자가 물질 세계와 비물질 세계를 연결하며 물질적 사물들은 점차로 그 무한성을 잃어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지난 포스팅의 신플라톤주의와 유사합니다. 이들의 사상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또 플라톤의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더욱 엄격하게 받아들여, 영혼을 담는 그릇이자 곧 썩어 문드러질 옷인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육체의 쾌락과 감각적 충동들은 영혼의 정화(Catharsis, 카타르시스)에 해로우므로 포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엄격한 수행과 관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비기독교 종교로서의 철학과 새로운 사상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신플라톤주의자인 이암블리코스는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영지주의의 세계관과 구원론
2세기경 지중해 연안에서 발달한 영지주의는 신피타고라스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직설적이었습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그노시즘)는 신비한 지식(靈知, gnosis, 그노시스)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는데, 우주나 역사의 분석에 관한 뚜렷한 철학적 이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노시스란 그리스어로 지식을 뜻하는데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에도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을 비롯한 신비주의 사상에 남아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계를 선한 신적 영역과 악한 물질 영역으로 이원화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본래 신적 영역에 속했으나,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는 하위 창조신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 세계에 갇혀 있다고 보았으며 이 창조주는 기독교의 구약 신과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이 언급한 창조신으로 본래 선악의 구분이 없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그를 악한 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하에서 세계는 곧 정신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의 투쟁의 무대로 그려집니다. 이에 따라 세계는 처음부터 숙명적으로 상반된 두 세계로 존재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 악한 세상을 창조한 데미우르고스의 지배를 받으며 육체라는 물질 속에 갇혀 있는 정령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결코 육체를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정령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즉 구원은 소수의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보았는데, 이 사상의 선민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영지주의는 다신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호소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정령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그리스도도 포함되었고 또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는 정령들에게도 호소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절대신 역시 완전한 선과 빛의 근원인 최고 신이 있는 반면에, 물질 세계를 창조한 데미우르고스라는 불완전하고 악한 신도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많은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물질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정령은 충분한 정화를 받을 경우에만 물질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 육체로부터 이탈된 정령들만의 맑고도 조촐한 행복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한 지식을 통해 자신의 신적 기원을 깨닫고, 물질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본래의 신적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상가로는 발렌티누스(Valentinus), 바실리데스(Basilides)와 같은 이들이 있으며 복잡한 우주론과 구원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와 접촉하며 발전했지만 4세기 이후 니케아 공의회와 정통 기독교의 탄압으로 쇠퇴하였습니다. 영지주의 문헌 대부분은 파괴되었으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통해 그 사상이 재조명되었습니다.
헤르메스주의, 그 비밀스러운 지혜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는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에 형성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이 융합된 신비주의 체계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사상입니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는 고대 이집트의 지혜의 신 토트와 그리스 신 헤르메스가 결합된 반신적 존재로, 지혜와 마술, 철학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헤르메티카(Hermetica)』라는 문헌군을 통해 전해지는 이 사상은 우주의 신비한 질서와 인간의 영적 변환을 강조했습니다.
세계를 물질 영역과 신적 영역으로 엄격히 나누었던 영지주의와는 반대로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우주는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위의 것이 아래의 것과 같고,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과 같다”라는 대응 원리를 주장하며, 거시세계(우주)와 미시세계(인간) 사이의 신비한 연관성을 탐구했습니다. 즉 우주를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 보며, 인간(소우주)이 우주(대우주)와 상응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원리는 모든 존재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기에 인간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지고한 신인 ‘누스’가 자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으나 인간은 자연과 사랑에 빠져 타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 결과 육체의 욕망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본래 불멸하는 영이었던 인간이 육체로서 필멸하고, 창조물들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으면서 운명에 지배당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헤르메스주의에 혼입된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육체를 가진 타락한 영이 된 인간은 영적 여정을 거치며 신성과 합일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개인은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 여정은 “위대한 작업”으로 불리는데, 이는 연금술(Alchemy)적 변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독특한 점입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연금술을 통해 물질의 변환뿐만 아니라 영혼의 정화와 고양을 추구했습니다.
헤르메스주의는 고대 이집트 종교, 플라톤 철학, 영지주의 ,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 연금술 등 다양한 전통을 통합하려는 절충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다신론적 관점을 기반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신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일신론적인 경향도 있습니다. 이 사상은 중세의 마술적이고 연금술적인 사조로서 발전하다가 근대 장미십자단 등 비밀결사에 계승되기도 하였고 프리메이슨과 신지학회 등 신비주의 계열의 사상들에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을 신성이 드러난 것으로 보며, 자연 속에서 신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이러한 자세는 자연 철학과 연금술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원시적인 형태는 연금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방법이 틀렸기는 해도 자연을 바라보는 유사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 철학의 영향과 유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비주의 철학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중세 기독교 철학과 이슬람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부활하여 피치노(Marsilio Ficino)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비록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그 급진적 이원론과 구원론은 서양 종교철학의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습니다. 헤르메스주의는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철학과 과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현대의 신비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 철학은 단지 한때 유행했던 사조가 아니라 서양사 전반을 흐르는 도도한 물결입니다. 과학의 발흥 이전에 초기 과학을 형성했고,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신성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합리주의로 빠지지 않고 이성적 논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재와 신비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합리주의적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간 정신의 더 깊은 차원을 탐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문화와 낭만주의 사조, 예술 작품 등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