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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의 세계, 혼란 속에서 피어난 지적 구원

by 미디옴 2025. 2. 20.

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양철학사의 열다섯 번째 이야기로, 고대 후기 철학의 중심이었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세기 로마 제국은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위기, 종교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부 사상가들은 아카데메이아의 몇몇 지도자들에게 침투해 들어간 회의주의나 스토아주의, 기타 헬레니즘 세계의 퇴폐적인 요소들로부터 대항하기 위해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부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사상을 재해석하며 현실을 불완전함을 초월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신플라톤 학파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을 토대로 헬레니즘 철학, 동방 종교까지 흡수한 종합적 사상체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재해석한 신플라톤주의는 본래의 의미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보완하기도 하며 이후 중세 기독교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신플라톤주의의 등장과 플로티노스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어 로마로 이어진 철학 사조로, 그 창시자는 플로티노스(Plotinus, 204-270)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리코폴리스(Likopolis)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한 뒤 로마에서 학원을 열었습니다.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Porphyry)가 스승의 강의록을 편집한 9편의 논문이라는 뜻의 에네아데스(Enneads)는 신플라톤주의의 핵심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플로티노스 삽화
플로티노스

 

그가 살던 당시 로마는 끔찍한 재난과 빈번한 전쟁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부패하면서 북쪽으로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몸살을 앓고,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인들의 침입에 시달렸습니다. 전쟁과 역병으로 인구의 3분의 2가 줄었을 만큼 혼돈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지나치게 높은 세금으로 인해 지방의 도시들은 재정 파탄에 이르렀고, 시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져만 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살아 있는 내내 이어졌는데, 그 결과 플로티노스는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쪽으로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하고 사후 세계만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교의 사상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러한 흐름과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현실의 고통 앞에 당시 사람들은 물질주의와 회의주의에 염증을 느끼며 영적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더욱 체계화하고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만 감각 세계와 이데아 세계가 따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원론적 해석은 배격하면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 계열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세계의 근원을 일자(一者, The One)’라 부르며, 이것이 만물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보았습니다. 일자는 인간의 언어나 사고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절대적 통일성이자 완전성의 상태입니다.

 

유출설과 존재의 위계

 

신플라톤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논의는 유출설(流出說, Theory of Emanation)’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하면서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했다면, 플로티노스는 자기 자신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궁극적 존재로서 일자를 규정하고, 절대 근원인  일자로부터 모든 존재가 단계적으로 흘러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완전 무결한 존재입니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유사한 면이 없진 않지만, 일자는 시공간이 없고 그것을 규정하는 어떠한 속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입니다. 

 

유출설을 표현한 이미지

 

거기에는 어떠한 인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월적 일자에게는 아무런 결핍도 없고, 그 자체로 존재의 충만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마치 태양에서 빛이 퍼져 나가듯이, 스스로를 넘쳐나게 하여(Emanation) 세계를 생성하는데, 이로부터 순차적으로 존재가 유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자에 인과를 적용하는 순간 또 다른 이원론을 도입하는 것이 되므로 일자는 그 자체로 시공간을 초월한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일자는 모든 차별과 결핍과 시공간을 유출시키는 근원이 됩니다.

 

유출의 첫 단계는 누스(Nous, 理性)입니다. 이는 순수 지성의 영역으로,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세계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프시케(Psyche, 靈魂), 개별 영혼들의 원천이 되는 세계영혼(World Soul)입니다. 세상은 그저 제멋대로인 것이 아니라 명확한 목적론적 조직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다만 누스에 비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어서 시공간의 세계와 유한성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인간 역시 영혼이 있으며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질계(Matter)가 있는데, 이는 가장 낮은 단계의 실재로서 빛이 거의 미치지 않는 어둠의 영역입니다. , 여기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물질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물질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원 존재인 일자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성의 감소 또는 소멸을 뜻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위계에서 상위의 것은 하위의 것을 포괄하고 완성하며, 하위의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시 일자로 돌아가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항상 상위를 지향합니다. 이러한 관상적 욕구는 상위 단계에서 받은 유출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으로, 인간의 영혼 역시 이러한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상승을 갈망하게 됩니다. 마치 플라톤에 있어 영혼이 개별자로 살면서 망각한 이데아들을 다시 상기해내는 과정을 겪듯이 말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이런 관계로부터 선과 악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는데, 일자로부터 멀어질수록 선에서 멀어지고 악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선은 일자에 가까운 상태이며, 악은 일자와의 거리에서 비롯된 결핍으로 이해됩니다. 아래에 있는 물질계로 가면 갈수록 점점 결핍이 많아져서 일자의 완전성이 점차 희석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유출설의 일자, 누스(정신, 지성), 프시케(영혼)’는 후대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y)의 위격들과 달리 동등하지 않습니다.

 

포르피리우스와 플로티노스가 있는 삽화
포르피리우스와 플로티노스가 신비술을 통한 영혼의 정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장면

 

영혼의 상승과 신비적 합일

 

신플라톤주의에서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영혼이 일자와 합일(合一, Unity)하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이를 엑스타시스(Ecstasis, 脫我)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자아를 초월하여 일자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체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합일에 이르는 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덕()의 실천을 통한 육체로부터의 정화입니다. 둘째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누스의 영역으로 상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성마저 초월하여 일자와의 직접적 만남에 이르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합일의 경험을 자신의 철학의 핵심으로 삼았으며, 포르피리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여러 차례 이러한 신비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후기 신플라톤주의의 발전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노스 이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더욱 체계화되고 발전되었습니다. 특히 포르피리오스(Porphyry, 232-305), 이암블리코스(Iamblichus, 245-325), 그리고 프로클로스(Proclus, 412-485)는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신플라톤주의를 확장했습니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논리학과 수사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저서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입문(Isagoge)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입문서로 중세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보편 논쟁(Problem of Universals)’의 시발점이 된 다섯 가지 보편자(五玄, quinque voces) (, genus), (, species), 차이(差異, differentia), 고유성(固有性, proprium), 우연성(偶然性, accidens) 의 분류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핵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암블리코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신비주의적이고 주술적인 요소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는 철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테우르기아(Theurgia, 神術)라 불리는 종교적 의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집트의 신비에 관하여(De Mysteriis)에서 그는 신들과의 교감을 위한 구체적인 의례와 기도문을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로마 후기의 종교적 분위기와 맞물려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는 또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주의자의 삶(De Vita Pythagorica)』을 쓰기도 했는데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신플라톤주의가 신피타고라스주의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온갖 종교적 의식과 신화를 포괄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다신교적인 신학을 시도하였습니다.

 

프로클로스는 아테네 학파의 마지막 거장으로, 신플라톤주의를 가장 체계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주저 신학 요론(Elements of Theology)에서는 존재의 위계를 더욱 정교하게 세분화했으며, 특히 삼원적 변증법(Triadic Dialectic)’을 통해 모든 실재가 머무름(μονή, remaining)’, ‘나감(πρόοδος, procession)’, ‘돌아감(ἐπιστροφή, return)’의 세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영혼 정화 방법으로 기도와 마술과 같은 신비적인 요소를 권장하였는데

 

이러한 후기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후대 기독교 신비주의와 중세 이슬람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흐르면서 이후 로마 시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시 부각되기 전까지 사상적으로는 쇠락해갔습니다.

 

플로티노스와 제자들 부조 이미지
플로티노스와 그의 제자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절망의 시대를 살았던 플로티노스였지만, 그의 사람됨만큼은 우울한 낙천주의자로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순후했고 고결함을 갖춰서 사람들을 감명시키곤 했습니다. 언제나 진지하면서도 시니컬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친절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와 그 후계자들은 모두가 로마 제국 영토 출신으로, 주로 지중해 동쪽 연안 출신이었는데, 이곳은 동양적 환경에서 오는 신비주의나 마술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동양적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플라톤주의는 본래의 사상과는 조금 멀어지게 되었지만, 풍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발전한 형태를 띠었습니다. 로마가 신플라톤주의의 발상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문화적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양적 신비주의와 결합된 신플라톤주의는 이후의 철학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기독교 박해에 저항해 교회를 육성하고 기독교를 변호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철학자들은 기독교 사상의 근거를 플라톤에서 찾기 시작했는데, 신플라톤주의의 개념들을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젊은 시절 플로티노스의 저작을 통해 이데아와 비물질적 실재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중세 기독교 철학에서는 신플라톤주의의 위계적 세계관이 천사들의 위계와 결합되었고, 신비주의적 전통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와 같은 신비주의 철학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피치노(Ficino)를 중심으로 한 플로렌스 아카데미에서 신플라톤주의가 부활하여, 근대 철학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신플라톤주의는 단순히 플라톤 철학의 재해석에 그치지 않고, 서양 철학사에서 독자적인 철학적 전통을 형성했으며,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집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플라톤 철학의 다른 계승자들 즉, 플라톤의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생각을 우주적 이원론의 체계로 몰아간, 이른바 그노시스주의 등으로 알려진 또 다른 유행의 흐름에 대해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