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앞선 포스트에서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를 다루면서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덕과 행복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금욕주의적인 삶이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어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또 다른 측면을 이어나간 그리스 로마 시대의 회의주의(Skepticism) 학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이것은 확실해”라고 말할 때, 정말로 그것이 ‘확실한 것’일까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회의주의입니다.
회의주의의 탄생과 피론의 근본적 질문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토론에 임할 때 항상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선언은 그의 절대적 진리를 향한 겸허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자세는 제자들을 통해 회의주의 학파로 이어져 모든 주장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진리를 확언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얼마나 확실할까요? 회의주의의 창시자 피론(Pyrrho, BC 360-270)은 바로 이런 물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소속되어 동방 원정에 동행했던 피론은 인도의 수행자들을 만나면서 깊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같은 현상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보며, 그는 ‘어떤 행동을 다른 행동보다 더 좋게 볼 합리적인 근거는 있는가? 과연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죠.
피론은 이러한 고민 끝에 ‘판단 중지(epoche, 에포케)’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꿀이 달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주관적인 감각일 뿐, 꿀 자체의 본질적 성질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운 방에 있다가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그면 차갑게 느껴지고, 추운 곳에 있다가 담그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모든 지각은 상대적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피론은 오히려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역설적으로 특정한 견해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정신적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으니, 그저 현재를 즐기는 편이 낫다는 생각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습니다.
피론은 책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위의 내용도 그의 제자 티몬(Timon of Phlius)이 ‘피로니즘(Pyrrhonism)’을 체계화한 내용을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분실되었지만 몇몇 남겨진 내용에 따르면 그는 ‘판단 중지’를 최고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피로니즘은 구체적으로 10가지 논증 방식(tropes)을 개발해 모든 명제의 모순을 폭로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예를 들면, 개가 듣는 소리와 인간이 듣는 소리는 다르고, 또 사람들 간에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각 기관의 차이로 인해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또 관습, 문화, 법률 등 사회적 규범은 상대적이어서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티몬은 일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무엇이든 다른 무엇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고, 이는 끝없이 순환하거나 아예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논증이든 증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증은 훗날 중세에 널리 퍼져 나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하였습니다. 티몬의 이러한 회의론은 결국 아독사(adoxa, 무주장) 상태에 도달해 정신적 평화(아타락시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티몬은 “현상은 언제나 타당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앞서 든 꿀의 예에서 “꿀이 달다는 주장은 거부하지만, 꿀이 단맛을 낸다는 주장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꿀이 실제로 단맛인지는 증명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현상(phenomenon)을 느끼고 그것이 자주 관찰된다면 한 현상에서 다른 현상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철학에서 경험론과 회의주의를 결합한 흄(Hume)의 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카데메이아의 개연론(Probabilism), ‘그럴듯함’의 철학
이러한 회의주의 흐름은 플라톤의 학당인 아카데메이아(Academia)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아카데메이아는 중기에 이르러 회의주의적 성향을 띠게 됩니다. 이를 ‘아카데미 회의주의(Academic Skepticism)’라고 부르는데, 특히 아르케실라오스(Arcesilaus, BC 315-240)와 카르네아데스(Carneades, BC 214-129)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확실한 지식(katalepsis, 카탈렙시스)’의 가능성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는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철저하게 실천했죠.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책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래 같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두 생각이 서로의 사상을 논박하게 되는 것도 재미난 현상입니다.
아르케실라오스의 후계자로 아카데메이아의 우두머리가 된 카르네아데스는 로마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는 젊은 청중들을 상대로 하루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강연하며 정의를 찬양하고, 다음 날에는 그와 정반대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정확히 상반되는 진리를 설파했을 뿐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는데 그는 이 실험으로 진리의 상대성을 입증했습니다.
카르네아데스와 그의 다음 우두머리였던 클리토마쿠스(Clitomachus, 기원전 187년경~110년경)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개연성의 등급(pithanon)’이라는 실용적인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비록 절대적 진리는 알 수 없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더 그럴듯한 것과 덜 그럴듯한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진리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더 그럴듯한 것은 덜 그럴듯한 것보다는 낫다는 것인데요. 마치 오늘날 과학이 절대적 진리가 아닌 ‘현재까지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크스투스 엠피리쿠스와 회의주의의 현대적 의의
클리토마쿠스 이후에는 아카데메이아에서 회의주의 경향이 더 지속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사라지진 않다가 크노소스 출신인 크레타 사람 아이네시데모스(Aenesidemos, AD 100년경)에 의해 부활했습니다. 그는 다시 초기 피론주의 사상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추종자 중 유명한 고대 회의주의자로는 로마 시대의 세크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AD 160년경-210년경)가 있습니다.
의사였던 그는 경험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지만, 회의주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의 저서 『피론주의 개요』(Outlines of Pyrrhonism)에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에 대해 검토하고 스토아 학파와 같은 독단적 철학자들의 논리학적 주장들을 반박했습니다. 또 『학자들에 반대하여』(Adversus Mathematicos)에서 문법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그는 초기 피로니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수용했습니다. 첫째로 현상(Phainomenon)에 순응하는 것이고, 둘째로 감정(pathe)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즉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됩니다. 이를 두고 ‘배고픔이 악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술(Techne)을 활용하되, 의학은 증상을 완화할 수 있지만 ‘질병의 본질’을 논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넷째로 피론주의자들은 관습(Nomos) 즉 법률을 지키되, 다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지 않는다는 선에서 관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또 “같은 탑이 멀리서 보면 둥글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네모나게 보인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우리의 감각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인다”는 예시를 들며, 우리의 육체적 상태에 따라 지각이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했죠.
「신에 대한 믿음에 반대하는 논증」이라는 짧은 문헌에는 신과 관련한 비슷한 논조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회의주의자들도 신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신들을 숭배하지만, 신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라며,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본성이 각양각색이며 우리는 신에 대해 아무 경험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신의 속성을 알 길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의 존재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므로 증명이 필요한데, 누구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세크스투스의 이러한 통찰은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의 ‘방법론적 회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적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확실한 진리를 발견했죠. 또한 이를 통해 과학을 인정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이른다는 점에서 피로니즘의 근대적 극복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현대 과학의 기본 정신도 사실은 회의주의적입니다. 과학자들은 어떤 이론도 최종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항상 새로운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카르네아데스와 클리토마쿠스의 ‘개연성’ 개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죠.
회의주의는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이해를 추구하는 겸손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짜뉴스’와 ‘확증편향’이 만연한 시대에, 회의주의의 이러한 가르침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