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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파와의 이단 논쟁으로 본격화된 초기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 맺기

by 미디옴 2025. 2. 28.

지난 포스트에서는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가 되기까지, 기독교가 거쳐온 험난한 과정을 살펴보며 교회 이념의 형성 과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전개된 교회와 국가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탐구해 보겠습니다. 특히 4세기 아리우스파의 이단 논쟁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성 아타나시우스, 성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의해 온 과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종교와 국가권력은 협력과 견제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다음 포스트에서 알아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The City of God)에 이르러 교회-국가 관계가 철학적으로 정립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기독교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 272-337)의 통치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로마 다신교의 수장임을 자임하긴 했지만, 황제로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312,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시작된 정치 체제인 사두정치(Tetrarchy, 4인 통치체제)가 분열되었고, 제국의 서방 부제(Caesar)였던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정제(Augustus) 세베루스를 죽이고 황제를 참칭한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전날 밤 꿈에 키 로(ΧΡ, ΧΡΙΣΤΟΣ: 크리스토스의 약자)’ 문양과 함께 이 표식 아래 승리하라(In Hoc Signo Vinces)”라는 목소리를 들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날 전투를 앞두고 꿈의 계시에 따라 병사의 방패에 키 로 문양을 그린 후 크게 승리했다고 합니다.

 

라바룸 그림
라바룸(labarum)

 

이 전투는 12년 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집권하는 길을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를 기점으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이듬해인 313, 그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용을 선언했고, 이로써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다른 많은 이교들과 동등한 합법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수용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닌 정치적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Great Persecution, 303-313) 이후 기독교 공동체는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이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그는 로마 제국의 통합을 위해 단일한 종교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사두정치체제 이후 분열되어 있던 제국에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에 상당한 특권과 재산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박해 때 압류된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고 교회 건물 건축을 지원했으며, 성직자들에게 세금 면제 혜택을 주는 등 교회의 법적 지위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종교적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예로 뒤에 설명할 니케아 공의회가 있는데, 이러한 모델에서는 황제가 세속적 권력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에서도 최고 권위자로 기능합니다(이와 반대의 형태는 신권정치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교회 외부의 감독(episcopus externus)'으로 여김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함께 있는 그림
콘스탄티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Peter Paul Ruben 作

 

아리우스파, 치열한 이단 논쟁의 겉과 속

 

아리우스파(Arianism)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교리 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인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었습니다. 318년쯤 되는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사제들이 모여 구약 성경의 난해한 본문을 선택해 해석해 보는 공부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들 중 하나였던 아리우스(256-336)는 이를테면 하나님이 지혜를 낳고 창조한다는 부분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아리우스는 이를 아들(그리스도)이 나거나(begotten), 창조(created)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아리우스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고, 무감동한 유일 근원의 존재이기에 아들은 하나님과 동일할 수가 없으며, 만약 동일하고 같은 존재라면 유일 근원의 신이 둘이 되는 것으로, 유일신 신앙에 반하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단일 군주인 하나님만이 원인과 시작이 없는 아나르코스(anarchos)인 존재지만, 아들은 원인이 있어서 존재하게 되는 시작이 있는 존재, 즉 아르케(arche, 원인, 근원, 시초)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것이므로 아들은 유감동한(passibility) 존재, 즉 감정 변화와 고난을 겪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과 동일한 존재라면 하나님이 유감동한 존재가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리우스에게 아들은 변화와 고난의 존재, 즉 시작이 있는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아리우스는 성부(하나님)성자(그리스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한때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아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이므로 하나님보다 열등하며, 따라서 동일 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이 아니라 유사한 본질(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을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호모우시오스즉 동일 본질을 뜻하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동일하다는 의미의 호모(homo)와 본질을 뜻하는 우시아(ousia)의 합성어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아리우스파가 주장하는 호모이우시오스는 유사 본질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본질을 뜻하는 우시아가 이제는 하나님의 본질을 뜻하는 단어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을 넘어 심오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로마 제국의 계층적 구조와 더 잘 어울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개념은 황제가 신민들보다 우위에 있는 제국의 구조와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리우스파는 동방 교회, 특히 시리아와 소아시아와 같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들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니케아파(정통파)는 서방 교회와 로마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신학적 논쟁이 지역적, 정치적 분열과 일치하면서 이 갈등은 제국의 통합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갈등이 자신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를 소집했습니다. 이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황제가 교회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첫 번째 공식적인 사례였습니다.

 

주교들의 발밑에 둘러싸여 있는 아리우스 그림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주교들의 발밑에 그려져 있는 아리우스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을 통해 아들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이라는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이 용어를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 권력이 교회의 교리 논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즉각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리우스파는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했고,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후기에는 아리우스파에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교리적 확신보다는 정치적 실용주의가 그의 종교 정책을 결정했음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성 아타나시우스, 제국의 간섭에 맞서 정통 교회의 깃발을 세우다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 296-373)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아리우스파에 대항하는 니케아 신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습니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이후 평생에 걸쳐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은 계속 증가했고,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종종 아리우스파를 지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생애 동안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으며, 사람들은 그에게 아타나시우스 홀로 세상을 대적하다(Athanasius Contra Mundum)”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신적 단순성(divine simplicity)을 토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일한 본질임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우시아)로부터 아들이 나지 않았다면 신성에서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기에, 본질로부터 본질이 나오는 즉,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낳음과 지음 받은 분이 아니라는 니케아 신경의 내용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단순성이란 하나님은 완전하고 불변하므로, 하나님의 속성이 곧 그분의 본질이며 하나님의 본질이 곧 그분의 속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부분으로 합쳐지거나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속성을 소유하지 않고 그저 그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을 소유하시니라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하듯이 말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 나오셨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배격했습니다. 마치 인간이 아들을 낳듯 하나님이 아들을 창조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의 아버지라는 말이나 우리가 하는 말은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되어버린다며, “마치 물질을 나누듯이 나누고 구분하고 창조하는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 영원하고 불변하는 영원한 출생에 주목함으로써 나뉘지 않는 본성의 단일성과 빛의 동일성을 보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참으로 말씀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하나님과 아들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투쟁은 단순한 교리 수호를 넘어 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회(Ecclesia)가 제국(Imperium)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황제는 세속적 영역에서 최고 권위자일 수 있지만, 교리와 신앙의 문제는 교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저서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Against the Arians)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철학적, 신학적으로 변호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 아니라면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구원의 능력을 보장하고, 그분의 인성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만약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면 그의 희생은 제한적이게 되며,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말씀의 성육신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닌 존재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인성을 취함으로써 인간을 신성과 결합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구원의 연결고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이때 성부(하나님)가 성자(그리스도)와 같은 본질이어야만 이 연결고리는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타나시우스를 대적하면,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을 대적할 것이다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국가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회가 단순히 국가의 도구가 아닌 독자적인 권위를 가진 기관이라는 그의 신념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끈질긴 저항과 신학적 깊이는 결국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니케아 신경이 최종적으로 승인되었고, 아리우스파는 결정적으로 이단으로 낙인찍혔습니다. 이는 교회가 교리 문제에 있어서 국가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립한 사건이었으며, 후대의 교회-국가 관계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선언하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그림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최종적으로 채택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성 암브로스와 테오도시우스, 교회-국가 관계를 규정지은 결정적 순간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국가 아래에 있는 혹은 종속된 기구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성 암브로시우스(Sanctus Ambrosius, 339-397)는 밀라노의 주교로서 교회와 국가 관계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물입니다. 그는 신학자이자 행정가, 철학자로서 풍부한 로마 교육을 받았으며, 주교가 되기 전에는 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있던 당시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 347-395)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황제로 당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세력과 니케아 신경을 거부하는 아리우스파 등 다른 종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하자, 380년에 단독으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테살로니카 칙령(Cunctos populos)을 반포했습니다.

 

그는 이 칙령에서 니케아 신경을 따르는 교인만이 보편적인(catholicorum, 가톨릭)” 기독교인이며, 그들이 다니는 예배 장소만이 교회의(ecclesiarum) 이름을 부여받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아리우스파를 비롯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인들을 가리켜 정신 나간 미치광이”라고 묘사하며, 이단으로 낙인찍었고 탄압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390년 테살로니카 학살(Massacre of Thessalonica)과 그 여파였습니다. 로마군 수비대장이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집단 폭행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황제는 이에 격분하여 그 응징으로 7,000명 이상의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황제가 공개적으로 참회하기 전까지 성찬식(Eucharist) 참여를 금지시켰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전통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최고 권위자로 여겨졌으나,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조차도 교회의 도덕적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는 참회의 의미로 황제의 예복을 입지 않고 교회에 왔으며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공개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최근 학자들에 따르면 주교가 황제의 교회 출입을 제지하는 전설적인 밀라노 대성당 입구에서의 만남은 역사적 허구로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라고 하며, 두 지도자의 만남은 두 최고 기관 사이의 협상에 관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세속적 권력(Potestas)’영적 권위(Auctoritas)’의 구분을 명확히 했습니다. 세속 권력은 물리적 강제력을 가지지만, 영적 권위는 도덕적 차원에서 그것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후대의 교회-국가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Imperator enim intra Ecclesiam, non supra Ecclesiam est)”. 암브로시우스가 남긴 이 유명한 말입니다. 이후 중세 교회와 국가 관계의 기초가 되는 원칙을 확립한 이 주장은, 교황 겔라시우스 1세가 발전시킨 양검론(Two Swords Theory, 兩劍論)’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의무에 관하여(On the Duties of the Clergy)라는 저서를 통해 기독교적 통치의 원칙을 정립했습니다.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덕목과 기독교 윤리를 결합한 이 책은 기독교 군주론(Christian Kingship)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암브로시우스
성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 대성당 입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출입을 제지하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린 신성한 허구, 안토니 반 다이크 作

 

이중 권위 모델이 서구 정치 사상에 남긴 유산

 

4세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의 투쟁은 서구 문명에서 교회와 국가 관계의 기본 틀을 형성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부터 성 암브로시우스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한 저항까지, 이 시기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독립적인 영역을 가지면서도 상호작용하는 이중 권위 모델(Dual Authority Model)’이 확립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모델은 동방 교회의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동방에서는 황제가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도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지만, 서방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황 겔라시우스 1(492-496)양검론에서 이러한 원칙은 명확하게 정립되었습니다. 겔라시우스는 세상은 두 개의 권력, 즉 교황의 성스러운 권위와 왕의 세속적 권력에 의해 통치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중 권위 모델은 후대의 서구 역사에도, 정치 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속 권력과 영적 권위의 분리는 물론 그 세부적인 분위기는 판이하지만, 그 큰 작동 방식에 있어서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인 권력분립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교회가 국가 권력에 도덕적 제동장치 역할을 한 것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모델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구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황권과 왕권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을 초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한 권력이 전제적으로 군림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서구 사회에서 절대주의가 동방만큼 강력하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개의 검

 

학창시절, 밤새워 세계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왕권이 강화되면 교황권이 약화되고, 교황권이 강화되면 왕권이 약화된다는 이 두 관계를 달달 외웠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때 배웠던 내용의 배경을 형성했던 시기의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와 그 이면에 깔린 우시아(본질)에 대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이 바로 이번 포스트에서 다뤄본 내용입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와 로마 제국 간의 복잡한 관계는 단지 역사적 사건에만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종교와 정치 관계의 근본적인 틀을 형성한 중요한 발전이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시우스와 테오도시우스의 갈등과 타협 속에서 우리는 서구 문명의 특징적인 이원론적 구조가 태동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그 이론적 체계에서 교부 철학의 커다란 기둥이 된 교부들 중의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City of God)을 중심으로 이러한 교회-국가 관계가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그리고 중세 초기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