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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과 이해의 철학: 진리를 향한 조화로운 길

by 미디옴 2025. 3. 8.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성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는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여러 교부철학자 중 한 명이지만 철학사적으로 보았을 때 서양 사상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현재 알제리 수크아라스 지역인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의 관원으로 이교도 출신인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성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기는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점차 주류 종교로 자리잡아가는 과도기였습니다. 특히 410년 로마의 함락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대표작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집필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했고, 키케로의 글을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당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를 갖추었다고 느낀 마니교(Manichaeism)9년간 빠져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마니교의 유물론적 존재론과 아카데미학파의 회의론적 인식론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를 바라는 어머니와의 관계도 많이 틀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한 철학적 갈증을 느낀 그는 20대 초에 이른바 두 가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지적인 면에서의 회개로 플라톤주의에 관한 문헌들을 다수 읽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적인 내용들로, 그 덕분에 이데아 혹은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실재성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 실천적인 면에서의 회개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독교로부터 받은 영향과 당시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그의 강론에서 받은 큰 감동,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읽은 것이 회심의 계기가 되어 결국 386, 32세에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그의 개종 과정은 자전적 저서 고백록(Confessiones)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서구 문학의 첫 깊은 심리적 자기 성찰을 이룬 텍스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프라 안젤리코 作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 후 391년경에 사제로 임명되었고, 그로부터 5년 후에 히포(Hippo)의 주교가 되어 생애 마지막까지 35년간 그 직책을 헌신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특히 그 기간동안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대다수는 그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논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방대한 저술들은 중세 기독교 사상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한 반달족(Vandals)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히포시가 포위되었을 때, 아리우스파로 개종된 반달족들을 상대로 농성을 벌이며 피난민을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사상가로서도 신앙인으로서도 위대했던 그의 영향은 그와 함께 기독교 사상의 쌍벽을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가들, 그리고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그리고 지식에 대해

 

믿어라, 그러면 이해할 것이다(Crede ut intelligas)”라는 말로 대표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 추구의 자세는 그의 신적 조명설(Divine Illumination)’내면의 교사라는 개념으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그의 인식론의 핵심을 이루는 조명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몸담은 회의주의의 한계에 부딪힌 바 있었는데,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이를 논박하며 극복해 내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현실에서 관찰할 수 없는 이데아를 실재한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으며, 이데아란 다만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 만약 이데아가 실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신체의 감각을 통해 얻는 경험만으로는 이데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한 감각 능력으로는 궁극적인 실재를 알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입니다.

 

이에 대해 첫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가 존재함을 재확인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품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에 의해 발견되기에 앞서, 그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실재적인 실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직관하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영원불변하는 이데아라는 실재가 있는데, 이 이데아는 추론의 결과도 아니고 마음에 의해 발견되는 것도 아니며 이데아 자체를 통하지 않고는 그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도달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실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이데아를 우리의 감각이 인식할 수 없지만, 영영 인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조명설이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조명을 받을 때만 직관 속에서 그것이 마음과 직접 부딪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영원한 진리와 수학적 원리들이 신의 마음에 존재하며, 마치 조명의 빛이 어둠을 비추듯이 우리는 신의 빛을 통해 이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지식은 이데아와 같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입니다. 마음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계시되는 것이며, 따라서 권위를 가진 지식입니다. 마음이 변하더라도 이데아는 변하지 않듯이 이 지식은 영원불변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지식을 지혜라고 불렀습니다.

 

스탠드 조명 이미지

 

같은 맥락으로 마음과 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음이 본질이며, 신체를 통한 감각은 마음의 주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은 신체를 통해 느껴지는 그리고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에 주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단순하고 비물질적인 실체라면 신체는 복잡하고 물질적인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변화만을 우리는 인식하게 됩니다. 다만 신체의 감각이 변화하는 물질에 대해 보고 듣고 만지면서 얻게 되는 지식은 유용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지식마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진정 지식임에 틀림없지만, 물질세계에서 만물은 끝없이 변화하므로 그 지식은 유용하지만 영원불변한 지식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낮은 단계의 지식을 그는 과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로써 그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진리는 빛이며, 이 빛은 곧 신이라

 

그의 인식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내면성(inwardness)의 강조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네 안으로 돌아가라, 진리는 내면의 인간 안에 거한다(Noli foras ire, in te redi,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진리는 빛이며, 이 빛은 곧 신입니다. 그는 진리를 내면적인 빛으로 보았으며,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춘다고 믿었습니다. 이 빛은 요한복음의 로고스(Logos, 말씀, 복음)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로고스는 생명의 근원이며 사람들의 빛으로 묘사됩니다.

 

태초에 말씀(헬라어: 로고스)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그리스-로마인들에게는 이미 널리 퍼진 로고스 개념, 즉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우주의 근본 원리이자 만물을 지배하는 질서로서의 로고스가 사도 요한에 의해 기독교에 도입된 후로는 말씀으로 통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로써 말씀-그리스도의 선재성이 증명됩니다.

 

어쨌든 내면의 성찰을 강조하는 이 말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외부로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또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존재하므로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외부 세계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함을 암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Si fallor, sum(설령 내가 오류를 범한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말 역시 유명합니다. 당시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심하는 행위그 자체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지적하며 회의주의를 반박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든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이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존재의 확실성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인간 존재와 진리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이 인간에게 진리를 비추어 주기 때문이며, 진리는 외부 세계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됩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절대적인 진리(, 하나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memoria)에 관한 깊은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그에게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저장소가 아니라, 자아 정체성의 토대이자 신을 인식하는 매개체입니다. 고백록에서 그는 인간의 기억을 거대한 궁전(vast palaces)”으로 비유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 속에서 감각적 경험, 지적 개념, 감정, 심지어 망각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복잡성과 신비로움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기억의 방대함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며, 인간의 내면이 곧 신성에 이르는 길임을 암시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필리프 드 샹파뉴 作

 

시간의 철학은 어떻게 신을 호출하는가

 

고백록11권에서 그는 유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만약 누군가 물어서 설명하려 하면, 나는 모른다.”

 

이 질문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시간을 경험하고 측정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즐거운 순간은 길게 지속되기를 바라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시간은 우리의 감정과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됩니다.

 

영원한 존재인 신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순차적으로 시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에, 시간은 영혼의 분산(distentio animi)으로서, 현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 현재에 대한 주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구성됩니다.

 

이때 신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지만,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즉 사람이 그의 유한 의식 속에서 소규모로 하는 일을 신은 그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의식 속에서 무한히 큰 규모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결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따라서 창조를 언제 했는지에 대한 물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변화하는 세계를 창조하면서, 그 변화를 측정하는 척도로서 시간을 창조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의 섭리를 파악할 수 없지만 매 순간 희미하게나마 하나의 예시로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물들은 이러한 시간에 소유될 뿐 스스로 시간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영혼이 지닌 지향성과 거대한 궁전으로 비유되는 기억이라는 내적 공간을 통해 시간에 소유되면서도 스스로 시간을 소유할 수도 대상화할 수도 있게 됩니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들이 남기는 흔적을 통해 시간을 파악하지만, 이때 파악하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영혼의 분산성을 파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12권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그는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하고자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포괄적이며 일관적인 행위로써 그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하고자 한다. () 변하는 것치고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간은 다만 영혼의 분산성만을 파악하게 되는 유한한 시간, 변화하는 물질세계를 넘어서 신의 영원성을 소유하고 지향함으로써만 궁극적인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에서 가장 도전적인 주제 중 하나는 악의 기원과 자유의지의 관계입니다. 그는 마니교의 선과 악이 동등한 존재로서 대립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악을 선의 결핍(privation of good)’으로 정의했습니다. , 악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선의 부재 또는 왜곡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에서 악의 존재와 전지전능한 신의 완전성을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과 같은 이성적 동물에 있어서의 선택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논점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들어 마치 미래의 모든 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볼 수 있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 정해져 있다면 그건 바꾸어 생각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택의 자유가 지니는 도덕적인 의의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만 전체 시간을 동시에 보는 영원성 그 자체일 뿐이므로, 그것이 인간의 선택하는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인간에게는 선후 인과가 있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고,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님에게는 무시간적인 전체로서의 종합만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귀의하여 그분의 계율에 복종할 때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악에 빠질 때도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전능한 하나님의 정의(正義)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데, 만약 하나님의 선택에 도덕적인 의지를 구현하고자 하였다면, 그분은 자유로이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악을 허용하고 악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라도, 외적 필연성에 얽매여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는 세계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인간의 책임만을 강조하지 않고, 원죄(original sin)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유대 기독교적 개념에서 죄의 개념은 단순히 플로티노스의 존재의 결핍 내지는 타락이라는 소극적 정의만으로는 그 명백한 패악을 범하는 죄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손상되었으며, 구원을 위해서는 신의 은총(divine grace)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합의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고, 악은 이 자유의지를 오용한 결과이며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특히 웨일스 출신의 펠라기우스(Pelagius, 354년경~418년경)와의 논쟁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펠라기우스가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외견상 하나님에게 반하는 죄를 하나님의 의지와 무관한 것으로 돌린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은총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역사의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부인함으로써 종교적 관점을 약화시켰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논문을 통해 펠라기우스를 반박했으며 결국 그를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이 논쟁은 예정론 대 자유의지라는 기독교 신학의 오랜 딜레마를 형성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설을 더욱 강화하고자 신플라톤주의적으로 원죄의 결함을 극복하는 과정이 존재의 충실이라고 여겼으며, 존재의 충실성이 더해가는 사람일수록 점점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어 은총을 베풀게 되는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유대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은총을 자기의 죄를 충분히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베푸는 관용이라고도 보았습니다.

 

점차 교회가 가지는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그 권위에 대한 강조가 요청됨에 따라 성례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에 중점을 두게 된 그는 성례전을 통해 은총이 내리고 신의 애호를 다시 받게 되는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 숭배와 신비적 교섭을 강조함으로서 그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철회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철학을 통한 분석과 이해가 기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의무를 진 것은 아니며, 때때로 기도로서만이 그 이해의 난맥상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할 수 있는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서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산드로 보티첼리 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국가 이론: 천상의 나라와 세속 국가의 이중 시민

 

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살았던 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국가와 정치 공동체의 본질을 재해석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국가 이론을 발전시킨 주요 계기는 410년 고트족(Gothi)에 의한 로마의 함락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교도들은 로마의 몰락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대표작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집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에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단순한 순환적 과정(그리스-로마 관점)이 아닌, 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진행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역사는 두 나라,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와 ‘천상의 나라(civitas Dei)’ 간의 투쟁으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카인과 아벨, 홍수와 노아, 헤롯왕과 예수 등 역사적 실례는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상의 나라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권력과 물질적 번영을 중시합니다. 이와 반대로 천상의 나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로 구성된 영적 공동체입니다. 이 나라는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완성되지만, 지상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존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이 두 나라는 역사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한 중요한 점은 이 나라가 단순히 국가와 교회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국가와 지상의 나라가 일대일 대응하는 것은 아니며, 교회와 천상의 나라가 일대일 대응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방식과 가치 체계를 대표합니다. 바로 신에 대한 경멸에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amor sui usque ad contemptum Dei)”자기 경멸에까지 이르는 신에 대한 사랑(amor Dei usque ad contemptum sui)”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국가를 인간 삶의 최고 형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국가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지상의 나라는 단지 타락한 세계에서 필요한 제도에 불과했습니다. 국가가 평화를 유지하고, 비록 불완전하지만 정의(상대적 정의)를 시행하며,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즉 국가라고 해서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훌륭할 때도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물질적 사물들은, 만약 그것이 바르게 사용되기만 한다면 결코 악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궁극적인 행복과 구원을 제공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정의는 오직 천상의 나라에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상 교회라고 해서 천상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도 있지만 악한 사람도 있는, 누구든 가리지 않는 구원의 방주인 것이지 결코 선민의 단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를 제외하고는 구원을 위한 좋은 수단이 존재하지 않고 때론 불완전하지만 그 신적인 영원과 신성한 지위 때문에 그나마 현실의 세계에서는 가장 천상의 나라에 가까울 뿐입니다. 따라서 두 나라의 대립은 그것이 설사 교회 안에서라도 최후의 심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정치 권위의 기원에 관해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원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강제적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정치 권위는 죄에 대한 치료제로서,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통치자에 관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통치자는 자신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하고, 섬기는 리더십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통치자는 정의를 추구하고, 특히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셋째, 기독교 통치자는 참된 신앙을 장려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견해는 중세 정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통치자의 덕목이나 치세에 관한 교훈적인 목적으로 쓰인 ‘군주의 거울(mirror of princes)’이라는 문학 장르에 반영되었습니다. 아울러 그가 제시한 두 나라개념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세속 사회 참여 방식에 관한 중세 및 근대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

 

플라톤에서 시작된 고대 그리스 사회의 중요한 사상적 흐름은 플로티노스에 의해 신플라톤주의로 발전했고,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기독교 철학에서 하나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이 세 인물은 플라톤주의라는 전통을 공유하면서 각자 시대에 맞게 계승 발전, 혹은 전환을 이룬 위대한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였습니다.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자면, 플라톤이 그 정신적 가치(직관)’의 탐구에 봉사하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그 정신적 세계(이론)’의 완성에 봉사하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정신적 권능(신앙)’에 헌신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박하고 구조가 치밀하지 못한 탓에 때로 잘 이해되지 못했던 유대 기독교의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빛나는 재능으로 신플톤주의의 논리적 정교함과 결합함으로써 향후 중세 기독교 사상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내적 갈등과 고뇌를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지적 탐구와 개인적 여정을 분리하지 않는 철학의 본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선대 사상가들의 다양한 논점 중에서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진 것들을 종합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며 실천하는 지적 충실함의 표본이자, 자아를 향한 내면의 교사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로마-헬레니즘 시대로 이어지는 철학의 힘찬 여정이 쇠퇴하고, 중세 기독교 사회로 전환하면서 철학의 암흑기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하지만 신학이라는 거대한 형이상적 세계 안에서 철학이 다른 하나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전통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시기 전후까지는 위대한 철학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모르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인, 비종교인을 떠나 철학은 과학의 일부도 신앙의 일부도 아닌 그 자체로서 늘 인류 역사에 함께해 왔으며, 이제 신앙의 측면으로 좀 더 녹아들어 간 철학이 인류 정신의 어떤 위대한 면모들을 드러냈는지 앞으로 이어지는 포스트들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