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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대교황과 로마 교회의 권위 확립 [#서양철학사 24]

미디옴 202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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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로마 제국은 대외적으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대내적으로는 어지러운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교회 내부에서도 이단 논쟁으로 인한 소요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속사에서 뛰어난 지도력과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당시의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극복해나간 위대한 교회 지도자가 있었으니 레오 1(Sanctus Leo PP. I, 440-461)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대교황(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교황이자 뒤에 다룰 그레고리우스 1와 함께 유이한 대교황이기도 합니다.

교황 제도의 기원

교황 제도의 기원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베드로(Petrus, 페트루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안티오키아(안디옥)에 이어 로마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사목 활동을 펼치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바티칸에서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훗날 로마 교회의 주교로서 초대 교황으로 간주되었으며, 로마는 기독교의 중심지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로마 주교의 권위가 점차 다른 지역 교회의 주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제도적으로는 384년 로마 주교였던 시리시우스가 자신을 교황이라 칭하면서 교황 제도가 명확히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440년 로마 교황 레오 1세가 즉위하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권위를 공인받으면서,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로마 교회의 우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현재까지도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State)으로 대표되는 로마는 가톨릭교회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로마 주교가 교회의 수도 즉, 성좌(聖座)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았다는 마태복음 1618~19절에 근거합니다. 레오 1세는 ‘페트루스의 수위권(Petrine Primacy)’을 발전시키며 로마 교황이 다른 주교들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레오 1세는 칼케돈 공의회를 주도함으로써 이러한 지위를 확인하였고, 동방의 교회도 로마 주교가 사도 베드로를 잇는 후계자라는 관점에서 '명예 수위권'을 인정했습니다.

사도 베드로 성상
초대 교황 사도 베드로 성상. 그리스도에게 받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9)." 교황의 수위권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 하늘에서 보면 커다란 열쇠 구멍의 모양을 하고 있다.

레오 1, 교회학자로서 정통 교리의 수호자가 되다

레오 1세는 교황이자 교회학자(Doctores ecclesiae)로서 수많은 설교와 강론집을 비롯해, 173편의 방대한 서간집을 남기며 당대와 향후 교회의 이념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를 잇는 교황들은 잇따르는 단성론자들과 동방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레오 1세의 가르침에 따라 끝까지 칼케돈 신조를 수호했습니다. 당시 교부들은 그리스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동방 교회 출신이 많고 학계 흐름을 주도해 왔지만, 레오 1세에 이르러 로마 교회는 학술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당시 가장 치열했던 문제인 그리스도론, 즉 예수의 인성에 관한 연구와 구원론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론은 이전 포스팅에서 다룬 바와 같이 동정녀 마리아의 호칭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과 구원론에 관한 것입니다.

이 논쟁이 극에 달했을 때 레오 1세는 레오의 서한(Tome of Leo)’이라 불리는 친서를 칼케돈 공의회에 보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라는 정통 교리 확립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교의 서한은 훗날 전 세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교황이 내리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는 교황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의 첫 사례로 평가되었습니다. 물론 동방 정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레오 1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로마의 황실과 주교들에게 지속적으로 서한을 보냄으로써, 이단의 사상을 논박하고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한몸에 함께 지닌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칼케돈 공의회에서 확립된 교리가 널리 전파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교회학자로서 그의 설교와 서신은 철학적으로도 중요한데, 특히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된 ‘인간 본성’(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타락한 본성)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게 한 ‘자유의지’(이를 오용해 타락한 이후 죄에 예속된)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따라서 자유의지가 선을 선택하려면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을 발전시키면서도, 더 낙관적인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전쟁을 멈추게 한 지도자

레오 1세는 세속적으로도 전쟁을 막고 나라를 구한 실천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Attila)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고 452년 로마로 진격해왔을 때, 교황이 나서서 그를 설득했고 결국 침략을 단념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성 대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
라파엘로가 그린 <성 대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 로마 밖에서 훈족의 왕 아틸라를 만나는 교황 레오 1세의 곁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호위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모습을 본 아틸라가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이어 3년 후인 455년에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Genseric)가 침공해 왔을 때도 직접 중재에 나섰습니다. 이때는 비록 로마 약탈을 막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살인과 방화 행위에 대해서는 제제를 가함으로써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교황이 정치적 영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레오 교황은 일약 로마의 구원자로 떠올랐습니다.

레오 1세는 교황권의 확립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적 교황권으로 기독교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동로마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주교에게 교황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을 때, 이 조항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완강히 반대한 사례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후일 동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갈라져 그리스 정교회로 노선을 달리하기 전까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로마의 동서 분열 이후 지속적으로 갈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되게 됩니다.

결론: 교황권의 확립자이자 수호자로서의 삶

이처럼 레오 1세의 사상은 당시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멸망에 이르렀을 때도, 로마 교회와 교황은 황제를 대신해 민심을 수습하며 문화적, 사회적 통합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황의 수위권을 확립하고 중앙집권화를 통해 교황의 권위를 크게 강화했고, 그의 교의 서한은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라는 정통 교리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 시 용감하게 대응함으로써 서유럽 세계를 수호한 점, 173편의 서간과 100여 편의 강론집을 남긴 점 역시 교회학자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의 저술들은 오늘날에도 신학적으로나 라틴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교회는 교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체계를 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황의 영적, 정치적 권위가 크게 확장되었으며, 당시 교부 사회와 이어지는 중세 교회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후의 교회 분열사를 보면 불안한 통합이기는 하지만 그의 철학은 이러한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제시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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