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티우스: 서양 사상의 마지막 로마인이자 첫 중세인 [#서양철학사 25]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노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약 477-524)는 고대와 중세를 잇는 결정적인 교량 역할을 한 사상가입니다. 그는 종종 “마지막 로마인이자 첫 스콜라 학자”라고 불립니다.
아리우스파와 칼케돈파의 갈등이 부른 억울한 누명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축출하고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고트족의 지도자 오도아케르. 그가 이탈리아를 다스린 지 17년이 흐른 493년, 결국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군권을 위임받은 동고트의 테오도리쿠스(Theodoric)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이탈리아는 테오도리쿠스의 손에 떨어지게 됩니다.
고트족인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칼케돈 기독교 신자인 로마 황제와는 종교적으로 드러내놓고 부딪히진 않았지만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 레오 1세, 제논,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누스 1세로 이어지는 동로마의 황제는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정통 기독교도였고,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그치지 않는 단성론 논쟁 탓에 나라가 시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아예 단성론으로 기울기도 했습니다.
테오도리쿠스는 끝까지 교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런 종교적 분란의 씨앗을 품은 상태에서 불안감은 상존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유스티누스 황제가 아리우스파를 탄압하고 나섰고, 이에 테오도리쿠스는 같은 가톨릭 기독 신앙을 가진 이탈리아가 황제의 편에 서지 않겠느냐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각 관료들이 로마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장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보에티우스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순수하게 계승한 그의 대표작 『철학의 위안(Consolation of Philosophy)』은 이 시기 보에티우스가 옥중에서 쓴 책입니다.
보편자 논쟁을 시작하다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자 뛰어난 교부 철학자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바탕은 신학보다는 그리스 철학에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그를 기독교도로 보아야 하는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일부 위작으로 판명되긴 하였으나 그의 기독교 교리에 관련한 저술들 덕분에, 사람들은 의심을 내려놓고 그가 잘 정리한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에티우스는 탁월한 번역가이자 주석가였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프로젝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모든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그들 사이의 조화를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비록 이 계획은 그가 처형되어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 중 『범주론(Categories)』과 『명제론(On Interpretation)』은 중세 초기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접근 가능한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였습니다.
그는 보편자 논쟁(Problem of Universals)의 기초를 놓은 학자로도 유명합니다. 보편자 논쟁은 나중에 스콜라 철학을 다룬 부분에서 살펴볼 실재론(實在論, realism)과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플라톤주의 내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립으로 펼쳐지는 중세를 수놓은 철학적 논점입니다.
이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한 포르피리오스(Porphyry)의 해설을 주석한 그의 저서 『포르피리오스의 해설에 대한 주석(Commentary on the Introduction of Porphyry)』에서 비롯됩니다. 포르피리오스가 논하지 않으려고 했던, 유(類)와 종(種)에 대한 부분을 보에티우스가 철저하게 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에티우스는 이 주석서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시도하며, 중세 철학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철학적 방법론 측면에서 논리학을 모든 철학적 탐구의 기초로 보았으며, 엄밀한 개념 정의와 논증 분석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후대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는데, 그가 스콜라주의 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산술론(De Arithmetica)」과 「음악론(De Musica)」은 중세 학원(schola)의 4학과(Quadrivium) 교육(산술, 기하학, 물리학,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학의 위안
그의 많은 저술 중에서도 특히 『철학의 위안』은 보에티우스의 걸작으로, 후대 스콜라 철학자들이 주석을 달며 연구한 권위 있는 텍스트이자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작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옥중에서 쓰인 이 작품은 철학(Philosophy)을 한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보에티우스는 행복, 운명, 자유의지, 신의 예지, 시간과 영원과 같은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탐구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시간과 영원에 대해 그가 제시한 개념입니다. 신이 시간 밖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바라본다는 ‘영원의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 개념은 후대 토마스 아퀴나스와 단테에 이르기까지 중세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학의 위안』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진정한 철학자들이라고 칭하면서 시작합니다. 반면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를 비롯해 이 세 명의 철학자를 제외한 나머지 철학자들은 철학자로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책 전반을 흐르는 전혀 미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철학적 논조와 담담한 자세는 사상적으로 플로티노스보다 플라톤에 더 가깝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비극적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갑자기 투옥되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그는 진정한 행복이 덕(virtue)과 지혜(wisdom)에 있으며, 외부 환경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스토아적, 플라톤적 관점을 견지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억울하게 투옥된 후 악법을 받아들이며 순순히 최후를 기다렸던 소크라테스의 뒤를 따르는 듯한 숭고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보에티우스는 「신학론집(Theological Tractates)」과 같은 신학적 저작들도 남겼습니다.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그는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삼위일체의 교리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일부 위작임이 밝혀졌지만,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중세 철학의 핵심 주제를 간파하는 이러한 선구적 활동은 후대 스콜라 신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종합하자면, 보에티우스는 고대 철학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동시에, 중세 사상의 핵심 문제와 방법론을 형성한 과도기적 인물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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