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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수도회의 발전과 사상: 고요한 사막에서 피어난 철학 [#서양철학사 27]

미디옴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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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세속화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수도원 운동(monasticism)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내부적으로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세속과 단절된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말기(Late Antiquity)라 불리는 이 시기에 수도원 운동이 발생한 이유는 다양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점차 세속적 권력과 결합하면서 초기 기독교의 순수성과 열정을 잃어갔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진정한 신앙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도시의 타락한 환경을 떠나 광야나 사막으로 이동하였고, 고행과 명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했습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악마의 유혹과 그 극복 과정,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는 일화는 중세 신비주의의 토대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은수자들(eremitic monks)에게 사막으로의 물러남, 아나코레시스(anachoresis, ἀναχώρησις)’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유사한 인식론적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세계의 환영에서 벗어나 참된 실재를 추구했으며, 이는 신플라톤주의의 초월(transcendence) 개념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수도원 운동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영적 수행의 형태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공동체적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여러 수도사들이 모여 살면서 공동의 규칙을 따르는 공주적(共住的, cenobitic) 수도원과, 혼자 살면서 수행하는 은둔적(隱遁的, eremitic) 수도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초기 수도원 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영성적 접근법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시나이산 기슭에 있는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548년부터 565년까지의 기간 동안 건설되었다.

성 안토니우스와 사막의 수도사들

서양 수도원 운동의 상징적 창시자는 성 안토니우스(St. Anthony the Great, 251-356), 그는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사막으로 들어가 고독한 영적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선택은 당시 로마제국의 물질주의와 세속화에 대한 철학적 저항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제자였던 성 대 마카리우스(St. Macarius the Great)와 같은 사막 교부들은 사막 교부들의 말씀(Apophthegmata Patrum)에 기록된 간결하지만 깊은 통찰력을 남겼습니다. 이들의 금언은 자기 인식과 영적 분별력에 관한 실용적 지혜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알게 되면 신을 알게 된다(Know yourself and you will know God)”라는 가르침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γνθι σεαυτόν, know thyself)”와 공명합니다.

또한 사막 교부들은 헤시카즘(hesychasm, 침묵 기도)’이라는 독특한 인식론적 방법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지식은 논리적 분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며, 내면의 침묵과 명상적 관조(observation)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학파와 플라톤주의의 정념으로부터의 자유(apatheia)’관조적 삶(bios theoretikos)’이라는 이상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것입니다. 금욕주의(asceticism)는 영혼의 정화와 신에 대한 완전한 집중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몸과 영혼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육체적 욕망의 극복을 통해 영적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사막에서의 성 안토니우스의 시련을 묘사한 많은 미술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공동체적 혁명: 파코미우스와 공주수도원의 창설

안토니우스가 독거 수도사(eremitic) 전통의 기초를 닦았다면,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48)는 공동체적 수도원(공주共住수도원) 생활의 창시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 상부의 타베네시(Tabennisi)에서 파코미우스는 최초의 조직화된 수도원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된 이상적 공동체(ideal community)의 기독교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는 수도원 공동체는 재산의 공유, 공동 기도, 공동 노동의 원칙하에 운영되었지만, 플라톤의 철학자-통치자 모델과 달리, 수도원 공동체는 수도원장인 아빠스(abbas)의 권위와 공동체 구성원들의 참여가 균형을 이루는 독특한 거버넌스(governance) 구조를 발전시켰습니다.

파코미우스가 확립한 수도원 규칙(Pachomian Rule)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코이노니아(koinonia, κοινωνία, 공동체)’의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 사회성을 인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을 반영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규칙은 기도와 노동, 식사와 휴식의 시간을 균형 있게 조절하는 체계적인 일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수도사들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겸손과 순종, 형제애의 덕목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뿐만 아니라 바구니 짜기, 농사, 제본 등의 다양한 육체 노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수도원은 개인의 영적 탐구와 공동체적 책임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좋은 삶(eudaimonia)’의 개념이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어,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의 선이 조화를 이루는 생활 방식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은 급속히 성장하여 그의 생전에 이미 9개의 남자 수도원과 2개의 여자 수도원을 포함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3,000명의 수도사들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수도원 모델은 후대 동방과 서방 교회의 수도원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실리우스와 동방 수도원 전통의 발전

4세기 카파도키아의 바실리우스(Basil the Great, 330-379)는 동방 교회 수도원 전통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배웠던 바실리우스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원을 방문한 후, 자신의 고향 근처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바실리우스가 저술한 장규칙(Longer Rules)단규칙(Shorter Rules)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정교회 수도원의 기본 지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보다는 균형 잡힌 영적 생활을 강조했던 바실리우스의 접근 방식은 수도원 공동체를 사회와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닌, 더 넓은 기독교 공동체와 연결된 존재로 보았습니다.

바실리우스의 철학적 사고는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그의 삼위일체론은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기독교 신학에 접목시킨 뛰어난 사례입니다. 헥사에메론(Hexaemeron)이라는 창세기 해설서에서 바실리우스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당대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의미하는 케노비아(koinobia)’의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실리우스의 수도원은 기도와 노동뿐만 아니라 사회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병원, 양로원, 순례자 숙소 등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에 봉사했던 바실리우스의 수도원은 영적 완성이 사회적 책임과 분리될 수 없다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오늘날의 수도원 과정에도 진로를 결정할 때 크게 신학 연구 과정과 직업 선택 과정으로 나뉘는데, 직업 선택 과정은 실제적인 기술과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이 일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형태로 여겨집니다.

메가스펠라이온 수도원 문 앞의 동방 정교회 수도사들
그리스 켈모스 산 아래의 험준한 절벽에 건설된 메가스펠라이온 수도원 문 앞에 있는 동방 정교회의 수도사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방 수도원 사상의 토대

서방 교회의 신학과 수도원 전통을 논함에 있어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회심 경험을 담은 고백록(Confessions)은 서양 문학사에서 최초의 내면적 자서전으로 평가받으며, 인간 내면의 심리적 복잡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보여줍니다.

히포의 주교가 된 후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주교관을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성직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작성한 수도원 규칙(Rule of St. Augustine)은 사랑, 겸손, 소유의 공유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했으며, 후대 여러 수도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은 그는, 특히 플로티노스(Plotinus)의 일자(the One)에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위계적 질서라는 개념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했습니다.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와 천상의 나라(civitas dei)라는 대비를 통해 역사의 의미와 인간 사회의 목적에 대한 철학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수도원 운동은 '천상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지상의 나라'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적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도원 생활의 핵심은 카리타스(caritas)’라는 개념으로, 이는 신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세속적 욕망인 쿠피디타스(cupiditas)’와 대비되는 이 사랑의 원리는 수도원 공동체의 영적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과 원죄론,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메테오라 수도원
그리스 메테오라의 삼위일체 수도원 ⓒ Bernard Gagnon

카시아누스와 수도원 영성의 체계화

동방의 수도원 전통을 서방에 전파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 인물로는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360-435)를 들 수 있습니다. 스키티아(현 루마니아) 출신인 카시아누스는 베들레헴과 이집트에서 수도 생활을 경험한 후, 400년경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했으며, 이후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동방의 수도원 전통을 서방에 소개했습니다.

카시아누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수도원 제도(Institutes)담화집(Conferences)은 수도원 생활의 외적 규칙과 내적 영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담화집은 사막 교부들과의 대화 형식을 통해 영적 완성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며, 후대 베네딕도 수도회 규칙의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카시아누스의 가장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eight evil thoughts)’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입니다. 폭식(gluttony), 음욕(fornication), 탐욕(avarice), 분노(anger), 슬픔(sadness), 권태(acedia), 허영(vainglory), 교만(pride). 이러한 분류는 후에 교황 레고리우스 1(Pope Gregory I)로 이어져 일곱 가지 대죄(seven deadly sins)’의 개념으로 발전하는 등 중세 기독교 윤리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시아누스는 실천적 철학(praktike)’관조적 철학(theoretike)’의 균형을 강조했습니다. 실천적 철학은 덕행의 습득과 악습의 제거를 통한 정화에 중점을 두며, 관조적 철학은 신에 대한 순수한 관상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이중적 접근은 에바그리오스 폰티코스(Evagrius Ponticus)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후대 서방 수도원 영성의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마르세유 근처에 설립한 생 빅토르(St. Victor) 수도원에서 카시아누스는 동방의 엄격한 금욕주의를 서방의 현실에 맞게 조정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서방 수도원 전통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특히 베네딕도 규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규칙서에서 수도사들에게 카시아누스의 저서를 읽을 것을 권장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습니다.

레린스 수도원: 서방 수도원의 요람

한편, 5세기 초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작은 섬 레린스(Lérins)에 설립된 수도원은 서방 수도원 발전의 중요한 장이 되었습니다. 오노라투스(Honoratus, 후에 아를의 주교)410년경 설립한 이 수도원은 동방의 수도원 이상과 서방의 문화적 전통을 결합한 독특한 모델을 발전시켰습니다.

레린스 수도원의 특징은 지적 활동과 영적 훈련의 균형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성경 연구와 교부 저작 필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동시에 엄격한 금욕 생활도 실천했습니다. 레린스는 많은 주교와 성직자를 배출했으며, 그들은 수도원에서 습득한 영성과 지식을 갖고 갈리아와 그 너머 지역의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레린스의 가장 유명한 수도사 중 한 명인 빈센트(Vincent of Lérins)경고록(Commonitorium)을 통해 정통 신앙의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이에 의해 믿어진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이라는 원칙은 가톨릭 교회의 전통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 포스팅에 계속)

레린스 수도원
레린스 수도원 전경. 해안가 가운데 성처럼 솟은 건물은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수도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1073년에 건설이 시작된 요새 수도원이다. ⓒ Anna Steve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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