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대 그리스 철학사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엘레아 학파(Eleatic School)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남부 이탈리아 변방 엘레아(Elea) 지방에서 활동한 엘레아 학파가 서양 철학과 현대 과학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파르메니데스로 대표되는 엘레아 학파의 사유는 세계와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오늘날의 서양 사상과 과학적 논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들의 사고방식으로 현대를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들의 사상을,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연결지어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레아 학파의 형성과 중심 사상
엘레아 학파는 현재의 이탈리아 남부 벨리아(Velia)에 해당하는 고대 도시 엘레아(Elea)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을 따서 ‘엘레아 학파’라고 불리게 된 이들은,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의 진실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기원전 540년경 포카이아인들이 페르시아의 침략을 피해 건설한 도시 엘레아는 철학적 망명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 학파 역시 지난 포스팅에서 살펴본 피타고라스 학파와 같이 남부 이탈리아 지방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 영향권 아래에서 비판적 사유가 꽃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스 식민지 시대의 변방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지적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변화는 환상이고 운동은 허구다!” 직관으로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사유를 했던 사람들이 엘레아 학파였습니다. 이는 감각적 경험을 철학의 적으로 선포하고 논리적 절대주의의 기치를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실재(reality)와 감각적 경험을 중시했던 사유, 우리가 두 번째 포스팅에서 다루었던 탈레스를 비롯한 밀레토스 학파와 같이 주로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났던 사유와는 그 태도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특히 “진정한 존재는 영원불변하다”는 충격적인 명제로 당시의 사유에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변해도 그 근본에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는데 마치 오늘날 우리가 보는 3D 영화나 가상현실(VR)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엘레아 학파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진정한 실재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학파의 창시자인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570-478 BCE)는 당시 사람들이 신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마치 소나 말이 신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그의 제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15-450 BCE)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는 감각 경험을 넘어선 순수한 논리적 사고, 즉 로고스(Logos, 이성)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수나 도형의 성질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혁명적 존재론
전설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는 “태양의 딸들”이 인도한 전차를 타고 진리의 궁전에 도달해 여신 디케(Dike)로부터 철학적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체험을 계기로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자연에 관하여』(Peri Physeos)라는 서사시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진리의 여신(Goddess of Truth)을 등장시켜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제1부, ‘진리의 길(Way of Truth, Aletheia)’이고, 다른 하나는 제2부, ‘속견(俗見)의 길(Way of Opinion, Doxa)’입니다.
재미있게도 파르메니데스는 젊은 시절 피타고라스 학파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배웠던 사유를 토대로 비판을 전개하게 되는데 과거 자신이 믿었던 견해를 ‘속견’으로 그리고 이를 비판하며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견해를 ‘진리’라고 구분하여 제시함으로써 사상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는 이분법과 이를 극복하는 변증법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와 속견, 지식과 오류, 실재와 가상, 지성과 감각 사이의 대조를 따라 전개되는데 이는 후세의 철학적 사색에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혹은 변형되어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파르메니데스의 사고방식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주장은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입니다. 이를 파르메니데스의 사고방식으로 논증해보겠습니다.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에는 비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존재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따라서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좀 복잡한가요? 수학 시간에 배웠던 ‘증명’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려 봅시다. ‘자연수 n에 대해 n^2이 짝수이면 n도 짝수이다.’를 증명할 때 ‘일단 n이 짝수가 아니라라고 가정해 보자. (풀이 과정을 보여주며) 그렇다면 이는 모순이다. n^2이 홀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입니다. 제1부 ‘진리의 길’에 등장하는 이 논리는 얼핏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함의는 매우 혁명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다고 말할 때,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면, ‘어제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1. 불생불멸성: 존재는 생겨날 수도, 없어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성은 존재가 비존재에서 나온다는 모순을 포함한다. 또 존재하는 것이 소멸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존재하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소멸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작용을 하려면 일단 존재해야 한다. 이는 존재와 불멸을 전제로 하므로 모순이다.
2. 불가분성: 존재는 나눌 수 없는 하나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분적이라면 그것은 일자(一者)요 유일(唯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 불변성: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란 현재의 상태가 사라지고 새로운 상태가 생기는 것인데, 이는 ‘있지 않은 것’을 포함하므로 불가능하다.
4. 완전성: 존재는 완전하며 결핍이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는 이와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는 결코 존재를 파악할 수 없으며 모두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자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눈과 코와 입이 거짓말을 꾸며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진리는 우리의 감각 기관이 주는 속임수 너머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과학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빛에 반사되어 망막에 맺힌 물건을 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 물건을 구성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빛의 파동, 그리고 뇌 속에서 이를 해석하는 전기적 신호이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과학적 진리 탐구 방식에도 파르메니데스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참고로 이와 같은 생성의 문제, 진정한 실재의 불변성 내지 항구성의 문제 등에 있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알아볼 헤라클레이토스가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우리가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이 세계는 허망하고 비실재적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떠한 주장이라도 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재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래서 결국 불변, 부동하며 불가분적인 일자(The One, 一者)뿐이라는 사실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중심으로부터 모든 방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원만한 구체(球體)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논의 역설(Zeno's Paradoxes)과 그 의미
파르메니데스 역시 그 당시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주장을 논파하는 일에 주로 매달렸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앞서 설명한 변증법으로 변호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 of Elea)은 스승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일련의 역설들을 고안했습니다. 그의 역설들은 오늘날에는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얼핏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묘한 설득력으로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Achilles and the Tortoise)’ 역설이 있습니다. 빠른 주자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보다 늦게 출발하면 그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가 출발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거북이는 이미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해 있고,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한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또 역시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해 있습니다.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므로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의 다른 유명한 역설들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화살의 역설: 날아가는 화살은 특정 순간마다 한 위치에 존재합니다. 만약 모든 순간을 개별적으로 본다면, 화살은 항상 정지해 있는 상태입니다. 마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연속 사진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2. 이분법의 역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간 지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 중간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또 그 절반을 가야 합니다. 이는 무한히 계속되고, 결국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게 됩니다.
3. 경기장의 역설: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는 두 물체가 서로 다른 기준점을 기준으로 관찰될 때, 상대적인 운동이 모순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증입니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일렬로 서 있다고 해봅시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각각 자신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이 같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 1분이 걸렸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그 다가온 두 사람의 입장에서 각 반대편에 있는 상대방을 보면 각각 움직인 거리의 합이 자신이 이동한 거리의 2배이므로 2분이 걸려야 합니다. 따라서 1분과 2분은 동일해야 합니다.
제논의 역설은 단순히 논리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가진 시간과 공간, 운동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미적분학이나 무한등비급수와 같은 현대 수학과 물리학의 발달로 물론 이를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철학적 사고 실험이나 이론에 영감을 제공하는 등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 사상에 미친 영향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대화편에서 그를 “존경할 만한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며 이데아론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에서 “비존재에 대한 논박”을 인정하면서도 운동의 현실성을 옹호하는 등 당시 지식 사회에 커다란 충격파를 안겨 주었습니다. 또한 엘레아 학파의 사상은 현대 철학과 과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현대적 논의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인식론(Epistemology) 측면에서, 감각 경험의 한계와 이성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들의 관점은 현대 과학 방법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 물리학자들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쿼크(quark)나 중력파(gravitational wave)의 존재를 수학적 논리로 증명합니다.
존재론(Ontology) 측면에서는, 시공간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통찰은 아인슈타인(Einstein)의 상대성 이론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한 존재의 단일성, 즉 모든 것은 일자(一者)로 귀결된다는 사고방식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 즉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이론의 역사는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을 비롯해 모든 과학자들이 찾고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종착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이 주는 혜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날에도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사고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학적 측면에서, 제논의 역설들은 연속성(continuity)과 무한(infinity)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세기 게오로그 칸토어(Cantor)의 집합론이나 현대의 미적분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발전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의 사상을 다루겠습니다.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라는 그의 유명한 주장은 엘레아 학파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