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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 시리즈29

레오 대교황과 로마 교회의 권위 확립 [#서양철학사 24]

5세기 로마 제국은 대외적으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또 대내적으로는 어지러운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교회 내부에서도 이단 논쟁으로 인한 소요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속사에서 뛰어난 지도력과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당시의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극복해나간 위대한 교회 지도자가 있었으니 레오 1세(Sanctus Leo PP. I, 440-461)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대교황(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교황이자 뒤에 다룰 ‘그레고리우스 1세’와 함께 유이한 대교황이기도 합니다. 교황 제도의 기원교황 제도의 기원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베드로(Petrus, 페트루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안티오키.. 서양 철학사 시리즈 2025. 3. 15.

고대와 중세 철학의 과도기에 펼쳐진 치열한 그리스도론 논쟁 [#서양철학사 23]

그리스도론 문제는 4세기에서 7세기까지 무려 300년 넘게 이어지면서 교회를 분열에 빠뜨린 대 논쟁으로, 공식적으로는 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종결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제국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사에서 중세는 일반적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4~6세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부터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시기는 기독교 철학의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기독교가 유럽 사회에 확산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지만, 여전히 그 위치.. 서양 철학사 시리즈 2025. 3. 12.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과 이해의 철학: 진리를 향한 조화로운 길 [#서양철학사 22]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성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는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여러 교부철학자 중 한 명이지만 철학사적으로 보았을 때 서양 사상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현재 알제리 수크아라스 지역인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의 관원으로 이교도 출신인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성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기는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점차 주류 종교로 자리잡아가는 과도기였습니다. 특히 410년 로마의 함락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대표작 『신국론(D.. 서양 철학사 시리즈 2025. 3. 8.

아리우스파와의 이단 논쟁으로 본격화된 초기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 맺기 [#서양철학사 21]

지난 포스트에서는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가 되기까지, 기독교가 거쳐온 험난한 과정을 살펴보며 교회 이념의 형성 과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전개된 교회와 국가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탐구해 보겠습니다. 특히 4세기 아리우스파의 이단 논쟁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성 아타나시우스, 성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의해 온 과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종교와 국가권력은 협력과 견제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다음 포스트에서 알아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The City of God)』에 이르러 교회-국가 관계가 철학.. 서양 철학사 시리즈 2025. 2. 28.

교회 이념의 형성 과정, 노바티우스설과 도나투스설의 도전 [#서양철학사 20]

초기 가톨릭 교회 이념의 형성 과정에서 내부적 도전을 제공한 두 가지 중요한 분파가 바로 노바티우스설(Novatianism)과 도나투스설(Donatism)입니다. 이 두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순수성과 성직자의 도덕적 자격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본질, 성례전의 효력,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에 관한 깊은 신학적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서 중세 철학의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노바티우스설(Novatianism): 교회의 순수성과 용서의 한계노바티우스(Novatianus, 200-258년경)는 로마의 신학자이자 사제로,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250년) 이후 교회 내에서 발생한 ‘배교자(lapsi, 背敎者)’ 문제에 관해 엄격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 서양 철학사 시리즈 2025. 2. 27.